-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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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재
- 2026-01-05
- 출발일자 2025.02.28
[안나푸르나] 푼힐/베이스캠프 트레킹 12일
2025년 2월 28일부터 3월 11일까지, 저는 생애 가장 긴 간절함을 가슴에 품고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히말라야로 향했습니다. 푼힐(Poon Hill)의 일출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의 장엄함을 꿈꾸며 떠난 11박 12일의 여정. 하지만 그곳에서 제가 만난 것은 화려한 풍경보다 더 깊고 묵직한 삶과 죽음,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었습니다.
이번 여정은 저를 포함해 7~8명의 대원이 한 팀이 되어 발을 맞췄습니다. 우리 곁에는 산의 숨결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지인 가이드들이 든든한 등불처럼 함께했습니다. 히말라야의 날씨는 마치 신의 변덕처럼 맑음과 흐림을 반복했습니다. 파란 하늘이 열릴 때면 설산의 봉우리들이 눈부신 은빛을 내뿜으며 우리를 유혹했지만, 구름이 몰려올 때면 산은 거대한 장벽이 되어 인간의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는 듯했습니다.
여정의 중반부, ABC를 향해 고도를 높여갈수록 산은 점점 더 엄숙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정상을 목전에 두고 발걸음을 돌리는 수많은 등산객을 마주했습니다. 기상 악화로 인해, 혹은 갑작스럽게 쏟아진 눈으로 인해 길이 막혀 내려오는 그들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하산은 포기가 아닌, 산의 의지에 순응하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다음에 다시 오라"는 히말라야의 무언의 메시지를 그들은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눈사태로 인해 산의 일부가 되어버린 어느 한국인 산악인의 비석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현장에서 마주한 그 비석은, 산을 지독하게 사랑했던 한 영혼이 마지막으로 머문 자리였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며, 저는 한참 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정복하고 싶은 대상이었을 이 거대한 산이,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 저미게 다가왔습니다. 산으로, 산으로만 가려 했던 그 뜨거운 열정과 그를 삼켜버린 차가운 눈사태의 비극이 교차하며, 산 아래 서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는 그 비석 앞에 짧은 묵념을 올렸습니다. 거창한 위로보다도, 우리가 지금 딛고 있는 이 한 걸음이 그분들이 그토록 걷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음을 기억하며 더욱 겸허히 길을 이어갔습니다. 죽음마저 품어 안은 히말라야의 거대한 자비와 엄격함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러 온 관광객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동료가 되었습니다.
7~8명의 대원은 서로의 거친 숨소리를 공유하며 안나푸르나의 품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현지 가이드들은 서툰 한국말과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격려했습니다. 그들은 산을 이기려 하지 말라고, 산이 열어주는 만큼만 보고 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맑은 날에는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마차푸차레의 웅장한 자태에 넋을 잃었고, 흐린 날에는 안개 너머에 숨겨진 진실을 상상하며 마음의 눈을 떴습니다.
12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 제 배낭에는 화려한 사진보다 더 무거운 생각들이 담겼습니다. 정상에 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풍경을 정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오만함을 버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눈사태 현장의 비석에서 느꼈던 그 숙연함은, 앞으로 제가 살아갈 일상 속에서도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안나푸르나는 저에게 일출의 찬란함 대신, 구름 뒤의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떠난 이들의 흔적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2025년의 봄을 여는 그 찬란하고도 애잔했던 히말라야의 공기, 함께 땀 흘린 대원들의 얼굴,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었던 가이드의 뒷모습까지. 이 모든 기억은 제 영혼에 깊은 골을 새기며 평생 잊지 못할 삶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히말라야는 결코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잠시 곁을 내어줄 뿐입니다. 그 신성한 배려에 감사하며, 저는 오늘도 내 마음속의 안나푸르나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