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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티벳불교에 대해서 - 성원스님 글
작성일 2009.05.14
작성자 권*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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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의 역사

성원 (동경대학 객원 연구원)
* 불교의 전래

불교는 송쩬 감포 왕(581-649)의 만년에 중국과 네팔에서 티베트로 최초로 전해졌다고 한다. 송쩬 감포 왕은 티베트의 문자를 창제하기 위해서 그의 신하 톤미 삼보타를 인도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티베트어의 창제를 통해서, 불교의 전적의 번역이 가능해졌다. 정치적으로, 송쩬 감포는 처음으로 티베트의 전체를 통일하였고, 라싸를 티베트의 수도로 정했다. 그는 또한 주위의 네팔과 중국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티베트인은 그를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간주한다.

* 티베트 불교의 토대 형성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의 계율과 금강승의 신앙적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티베트의 불교는 티베트, 몽고,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 주위의 국가들에서 믿어지고 있다. 이 티베트의 불교는 인도 불교학자 샨타락시타와 파드마삼브하바에 의해서 8세기 티송 데쩬 왕(742-97)의 후원 아래 정초되었다.
티송 데쩬 왕은 티데 쭉텐 왕(703-754)과 중국의 금성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불교를 티베트의 국가불교로 만들었고, 샨타락시타와 파드마삼브하바를 초청하였고, 삼예 대사원을 건립하였다. 나란다의 산타락시타는 중관불교의 전문가이고, 삼예 대사원의 건축의 책임자였다. 이 삼예 대사원은 마가다 왕국의 오단타푸리 사원을 모델로 건축되었다. 산타락시타는 설일체유부의 율장을 소개하였고, 그 설일체유부의 계율 전통에 의해서, 티베트의 초기 불교의 교단이 성립되었다. 파드마삼브하바, 티송 데쩬 왕, 산타락시타, 이 트리오는 티베트의 초기 불교의 성립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오디야나의 파드마삼브하바는 악신들과 불교에 적대적인 신들을 진무하였고, 그의 족적을 특히 닝마파에 많이 남기고 있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제 2의 붇다로 존경하였다. 현재에도 히말라야 지역의 국가들에서 그는 구루 린포체로 불리어지고 있고 대단히 존경을 받고 있다.

* 인도불교와 중국 선종의 논전(論戰)

중국불교와 인도불교의 관계는 인도의 학승 카마라시라와 중국의 선승 마하연의 돈점 논쟁에서 대변된다. 카마라시라는 산타락시타의 제자로 티송 데쩬 왕의 초대로 인도에서 티베트에 왔다. 티송 데쩬 왕은 인도의 점수 사상과 중국 선종의 돈오 사상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792년에서 794년 초에 소위 돈점 논쟁을 주재하였다. 카마라시라는 방편과 지혜의 겸수에 의해서 깨달음이 획득된다는 점수불교를 주창하였다. 이 논쟁은 삼예 대사원에서 행해졌다. 카마라시라는 그 돈점논쟁에서 돈오의 주창자인 중국의 선종의 마하연 스님을 논파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논쟁 이후에, 인도불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으로 된다. 카마라시라의 논지는 그의 저서 브하바나크라마(수행단계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 닝마파(古波)

닝마파는 티베트어로 (가장) 오래된 종파를 의미하고,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최초에 성립되었다. 닝마파는 파드마삼브하바, 비마라미트라, 바이로짜나의 가르침에 기초했다. 닝마파는 족첸(Dzogchen; Mah sandhi; Atiyoga; 위대한 완성)을 최고 수승한 가르침으로 간주하였고, 론첸파(1308-64)는 그 족첸의 가르침을 체계화하였다. 초기 닝마파는 재가신도와 승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랑다르마 왕(836-42)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11세기부터 불교는 다시 부활되었고, 그 새로운 불교의 전통과 구별하기 위해서, 닝마파 추종자들은 자기의 전통을 닝마파(오래된 종파)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 랑다르마왕의 불교 탄압

초기의 티베트의 불교는 랑다르마 왕의 억불정책으로 탄압을 받고, 토착종교인 본(Bon)교의 가르침이 판을 친다. 이 랑다르마 왕은 승려들을 정가에서 추방하고, 불교교단에 대한 국가적인 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했다. 이것을 랑다르마의 불교의 탄압이라고 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이 랑다르마의 불교 탄압을 기점으로 구역 불교와 신역 불교로 통상 구분된다. 그 후, 11세기에는 불교가 다시 부흥된다. 이 불교탄압이후의 불교를 신역 불교라고 부른다. 이 때, 카규파와 사키아파가 발전하고, 인도불교의 주요 텍스트들이 티베트어로 번역된다. 이 텍스트들이 티베트 대장경에 편입된다. 이 티베트 대장경은 칸규르 부분과 텐규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칸규르 부분은 한역 대장경의 경장과 율장에 상응하고, 텐규르 부분은 한역 대장경의 논장 부분에 상응한다.

* 카규파

카규파는 티베트어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구전) 전통을 의미한다. 이 종파의 핵심적 가르침은 마하무드라(大手印)와 나로파(1016-1100)의 여섯가지 교리이다. 이 여섯가지 교리는 여섯 가지의 명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나로파의 제자 마르파(1012-97)에 의해서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승되었다. 밀라레파(1025-1135)의 제자인 감뽀파(1079-1153)는 그 가르침을 카규파의 전통 속에서 조직하였다. 이 전통으로부터, 카르마 카규파와 다른 분파들이 생겨났다. 이 종파는 사자상승에 특별히 무게를 두고 있다. 카규파의 전통은 법신의 화신인 바즈라드하라(金剛持)에서 시작되고, 틸로파(989-1069)를 거쳐서 나로파에게 전승되었다고 한다. 위대한 번역사 마르파는 나로파의 제자로 이 사자상승의 전통을 티베트에 전승하였고, 그의 제자 밀라레파는 이 전통을 계승하고, 그의 제자 감뽀파에게 전승하였고, 감뽀파는 카규파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였고, 그에 의해서 카규파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된다.

* 사키야파

사키아파는 사키야 사원의 이름에서 기인한다. 이 사키아는 티베트어로 회색의 대지를 의미한다. 콘 콘촉 걀포는 11세기에 이 사키아 사원을 서 티베트에 창건하였고, 그 사원은 회색의 바위 표면 위에 건축되었다. 아티샤(980/90-1055)의 예언에 의해서, 그 사키아 사원은 1073년에 건립되고, 그 사원의 주지와 콘 가(家)의 멤버들은 방법과 결과(Lamdre; M rghaphala)라는 금강승의 핵심 가르침을 전승하였다. 사키아파는 밀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불교 논리학의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13세기와 14세기에, 사키아파는 티베트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키아파는 1092-1280년 사이에 독립된 종파로 아래의 다섯 명의 구루에 의해서 발전하였다. 이 다섯 명의 구루는 사첸 쿵가 닝포(1092-1158), 그의 두 아들인 소남 쩨모(1142-82)와 드락파 겔쩬(1147-1216), 그의 손자 사키아 판디타(1182-1251), 그리고 사키아 판디타의 조카 초겔 팍파 (1235-80)이다. 이 가운데, 사키아 판디타의 영향이 가장 컸고, 그의 학문적 평판이 인도에도 널리 퍼졌고, 그는 원나라로 초청되었고, 초겔 팍파는 쿠빌라이 칸(r. 1260-1294)의 왕사가 되었다. 원 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통치권을 이 사키아파에게 1249년에 수여하였다.

* 겔룩파(黃帽波)

14세기 말에, 겔룩파가 쫑카파(1357-1419)와 그의 두 명의 핵심적인 제자인 겔짭(1364-1432)과 케드룹(1385-1483)에 의해서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성립되었다. 겔룩은 티베트어로 덕행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1409년 쫑카파에 의해서 창건된 간덴사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문수 보살로부터 영감을 얻은 후, 쫑카파는 그의 수많은 주석서에서 찬드라키르티(月稱)의 귀류논증파의 중관학파의 가르침을 자기의 사상체계에서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한 불교의 수행론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는 발보리심을 그의 수행론에서 대단히 강조하였고, 수행론의 체계에서 지관(止觀)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밀교의 가르침이 이러한 평정심의 회복을 위한 특별한 테크닉으로 간주되었다.
이 겔룩파는 아티샤의 카담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추종하였고, 계율의 준수와 논서의 체계적인 연구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 가운데, 람림(Lamrim: 불교의 수행론)과 다양한 불교의 교리적 견해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 종파의 핵심적인 과제였다. 이 겔룩파는 티베트의 극서 지방에서 참도, 다르쩨도와 동쪽의 암도 지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제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강쪼(1543-1588)가 몽고를 방문한 후, 몽고의 후원으로, 겔룩파는 몽고와 러시아 연합의 부리아트 지역에서 국가 종교가 되었다. 17세기에 이 겔룩파는 중앙 티베트에서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 그 때 제 5대 달라이 라마 카왕 로상 강쪼(1617-1682)는 몽고군의 도움으로 티베트의 종교계와 정치계를 평정하였다. 이러한 겔룩파의 절대적인 위치는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 타시델레~
지난 8월 저희 혜초와 함께 카일라스에 다녀오신 성원스님께서 , 우리나라에서 아직 많은 이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티벳불교에 대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글이 티벳을 이해하려고 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바쁘신 중에 귀중한 글을 보내주신 성원스님께 감사드리며, 염치불구하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을 위해 계속 좋은 글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타시델레~^@^

작성자: 타시델레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