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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도를 다녀와서
작성일 2017.03.24
작성자 유*경
상품/지역
문화역사탐방인도/네팔/스리랑카


서 이사님!

 

감사합니다.

사진기 보험처리 완료 되었구요.

인도 기행문 한 번 써 보았습니다.

^^

 

 

찍을 수 없는 사진

 

 

떠나기 전에는 그랬다.

인도하면 생각나는 사람... 간디 ,마더 데레사 그리고 타고르.

그 분들 이름들이 내가 아는 인도 전부였다.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색채를 눈 안에 두지 않고,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인물들로 그냥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유명해서 알게 된 분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7박 9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생각나는 얼굴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인도의 살아있는 얼굴 하지만 사진기로는 도저히 찍을 수 없었던 얼굴들.

 

제 1일 : 2017년 2월 18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배행기니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마저 짐을 확인하고, 오후 1시쯤 대전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5시에 여행사와 미팅인데 일찍 도착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네팔 여행을 갈 때 있었던 여행 부스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안하게 느껴졌을 때 한 통의 전화로 확인을 해보니 완전 반대 편 부스에 여행사 미팅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잉. 시간은 넉넉했지만 장소는 저편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확인하지 않고 대한항공 편에 있었던 것이다. 내 불찰로. 어휴.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뭔가 조심하라는 사인이 내 안에 오고 있었다. 사실 아침에 떠나기 전 너무 느긋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집을 나서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동행한 딸아이가 갑자기 “엄마! 여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 여행사에 카톡으로 여권 앞면을 찍어 보내고 아예 챙길 생각을 안했었다. 찾아보니 원래 있던 제자리에도 없었다. 시간을 내 공항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겠다던 남편도 다시 올라와 우리 모두 찾기 시작했다. 여권에 방울이 달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찾지. 정말 하얗게 돼서 정신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둘 데가 없는데... 지금 생각하니 남편과 딸아이가 무척 고마웠다. 그 순간. 나 같으면 ‘거봐. 제자리에 안두니까 그렇지.’ 하면서 잔소리를 막 늘어놓았을 텐데 정말 아무 말 없이 찾아 주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지금도 고맙다. 정말 잔소리란 도움이 안 되는 건데 나 자신도 왜 그걸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찾았다. 사진 찍은 후에 나도 모르게 작은 쇼핑백에 담아 책장 선반에 올라 놓았나보다. 나답지 않은 결과에 너무 놀랐고, 시간 안에 찾아서 안도의 숨을 쉬며 딸아이에게 정말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치하하며 그렇게 우리는 행복하게 떠났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한 번의 반전은 있었으니... 역시 잔소리는 엄마의 전유물일까.

00여행사 미팅 역시 그렇게 내 실수로 반대편에서 시작했지만 무사히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딸아! 앞으로도 엄마가 화가 나 있을 때는 ‘인도 갈 때 여권 이야기’를 해줘. 알았지!”

우리까지 모두 20명이 아시아나 항공을 탔다.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모르고 그냥 우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시간의 비행은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델리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입국신고를 해야 하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에 짧은 줄을 찾아 바로 서야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말에 허겁지겁 e-Tourist Visa 카운터로 가는데 왼쪽 편에 동글동글한 접시모양의 구리 조형물이 일반 비자 라인 위 벽을 온통 덮고 있었고 사이사이에 큰 손모양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듯 여러 가지 포즈를 하고 있었다. 무척 특이하고 경이롭고 이색적이라 발을 얼른 앞으로 내디디면서도 눈은 저절로 뒤에 남아 여운의 눈빛을 남기다가 결국 지나쳤다.

입국 심사가 무척 까다로웠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이 현지시간으로 새벽 1시가 넘어서인데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열손가락 지문인식과 정면 얼굴 사진 촬영을 한다.

그것도 한 번에 통과 되는 것도 아니다. 몇 번을 다시 시도하며 통과 될 때까지 .

우리 뒤로 사람들이 계속 밀려 줄이 세겹 네겹이 되는데도 임국 심사대에 앉아 있는 인도인은 잠도 없는지 천천히 할 일 다 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아까 보았던 구리 빛 손모양의 여러 가지 포즈는 Welcome의 수화가 아닌 긴 열손가락 지문 심사를 의미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우리 일행 모두 무사히 통과되어 공항 게이트를 나오니 너무 깜짝 놀랐다. 그 새벽시간에 많은 인도인들이 흰 4절지 도화지만한 종이에 사람인지 그룹을 찾는 글자를 써서 들고 한 가득, 까만 밤 인도를 뒷 배경으로 서 있는데, 순간 올림픽 경기 카드 색션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인도의 원래 모습인가. 아님 그 만큼 인도 여행객이 많다는 표시일까.

마침 현지 가이더가 00여행사라고 쓴 코팅된 종이를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데 환하게 웃는다. 내가 만나서 인사한 첫 인도인의 모습이었다. 오! 인도인.

소공녀에 나오는 흰 터번의 원숭이를 기르는 인도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현대식 야구모자와 청바지를 입은 한국말을 아주 잘 하시는 인도인. 정말 상상 밖이었다. 짧은 인사를 대신으로 우선 우리는 호텔로 향했다. 인도를 향한 심쿵한 마음으로. 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런데 오늘 일진은 정말 끝까지 안 좋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묵을 호텔에서 방이 모자라는데 우선 순위로 배정하고 무작위로 순위에서 밀려 밀려 기다렸다가 트읜이 아닌 가이더님 앞으로 나온 더블룸으로 배정받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빨리 내일의 해가 뜨길...

호텔방으로 가는데 10층 이었나 11층 이었나 기억은 안 나지만 넓기는 운동장 만한데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화장실에서는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방만 그렇지 다른 곳은 비교적 지낼 만하셨나 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원래 인도 호텔은 원래 이런가봐 하고 생각했었다. 밤에 들어가서 호텔 외부는 오히려 생각이 나지 않아도 안은 가운데가 뚫려 마치 훈데르트 바서의 곡선의 집을 보는 듯 했지만 나는 배정된 방까지 가는데 내내 무섭기만 했다. 유리로만 된 난간이 영 부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추억이 되어있다. 사실 그날 첫 날밤은 인도에 대한 이미지의 신호탄과도 같았기에 더욱 그랬다.

 

재 2일 : 2017년 2월 19일 일요일

 

인도의 해가 떴다,

호텔에 들어 많이 자야 3시간 잔 것 같다. 그 정도라도 눈을 붙이고 쉬다 나올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실 인도라는 나라가 여행하기 쉽지 않은 곳이라 생각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제 본격적인 인도인 것이다.

아침을 호텔식으로 먹고 인도 라즈가트로 갔다. 1948년 1월 30일 극우파 반이슬람 힌두교도 청년에게 암살당한 마하트마 간디의 유해를 화장한 라즈가트. 그 화장터는

더 이상 화장터가 아니라 일반 공원과 같은 분위기로 풀과 나무의 조화와 너른 하늘 그 가운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 곳을 방문하는 인도인들의 숙연함속에서 살아있는 간디의 정신을 보는 듯했다. 조용하고 그윽한 무음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듯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맨발로 그 곳을 순례하고 있었다. 비폭력 무저항 . 마하트마 간디의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문호 타고르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장소를 옮겨 간디가 총을 맞고 쓰러진 친구 별장에 가보니 타고르의 사진도 나란히 붙여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78세 간디가 부축을 받고 나와 방문객들에게 일일이 인사할 때 누군가 물통에 총을 넣고 들어와 엎드려 인사를 하고 바로 총을 쏘았다니 너무나 야비하고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사적 사건 현장이 너무나 조용하고 깨끗하게 정리 되어 있어 간디의 저격 장소라고 가이더가 상기시켜 주지 않았다면 숙연한 마음을 가지고 사진을 찍지 못하고 즐거운 인도 여행의 한 장면으로 끝났을 뻔 한곳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즐거운 여행의 이미지 그리기를 중단하였었다. 사실 지금도 간디의 개인사(며느리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일)나 아프리카에서의 흑인 인종차별문제는 계속 화두가 되고 있지만 영국에 맞서 인도를 살리려 했던 점은 인정해야할 듯하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간디를 잘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한 음식점을 갔다.

일명 ‘탄두리’. 인도식으로 숯불에 구어 나온 닭요리인데 맛이 있었고 우리 옆 테이블들도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들이 거의인걸 보면 아마 외국인들 입맛에 맞도록 차려진 레스토랑인 듯 했다. 서비스도 좋고 맛있게는 먹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받다보니 닭이나 달(인도식 얇은 빵)이 까맣게 타서 나와 골라먹기 바빴다. 하지만 더운 인도에서 이렇게 우리 입맛에 맞게 먹을 수 있는 것도 큰 행운이면 행운이니까... 이름도 탄두리 아니던가! 두루두루 탄 탄두리.

레스토랑을 나와 아까 바로 식사 전에 지나쳤던 뱀 부리는 사람에게로 갔다. 딸아이가 그 뱀을 한 번 만져 보고 싶다고 했다. 1991년 야생동물보호법에 의해 점점 인도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 옛날 시바신의 추종자로 뱀을 알고 부렸다고 하니 문화의 차이가 시대를 건너와서 우리까지 특히 나에게도 전해져 섬뜩하고 차가운 기운이 든다.

하여간 우리 딸은 뱀 부리는 주황색 옷의 주황색 터번을 한 인도인 옆에서 코브라가 피리에 맞추어 서서히 바구니 위로 오를 때 사진을 같이 찍었다. 1달러를 주고. 또 달란다. 아까 주었다고 하니 그냥 수긍한다. 만약 내가 그때 일행과 가이더님이 옆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 사람 표정으로 보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인도처럼 남녀차별이나 카스트제도가 살아있는 곳에서. 그래서 나는 단체 여행을 선호한다. 배낭여행이 더 여유 있고 경험이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장점만 얘기하지 동전의 뒷면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배낭여행이 장점이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기 본인의 취향에 맞게 다니면 되는 것이다. 남에게 강요해서 그 책임을 대신 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는 인도 뉴델리 민속박물관과 국립박물관을 방문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가방을 들고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해서 한국에서 가신 인솔 가이더님이 남아서 우리 모두의 짐을 맡아 주시고 우리만 들어간 기억이 나는데 그 곳이 바로 민속박물관이라고 기억된다. 사진 찍은 것도 없어 뭘 보았었는지 영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행에서 힘이 들어도 사진을 찍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나보다. 기억의 회로.

국립 박물관은 그래도 밖과 안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 기억을 상기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1층은 인도 왕조 유물 전시, 2층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유물 그리고 3층은 서양유물인데 우리는 공사 중이라 2,3층은 못 본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수많은 힌두신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이슬람교도들이 침입시 어딘가는 꼭 한 두 군데 이를테면 코, 귀, 다리, 팔까지 댕강댕강 잘라내 놓아 성한 것은 거의 없는 듯 했다. 그래도 춤추는 시바신의 모습은 정말 매력이 넘쳤고 육중한 가네쉬 코끼리 신은 역시 귀여우면서 믿음직한 자태다. 그나마 금으로 된 부처님 사리 보관함은 유리로 철저히 보안을 해 놓았기에 안심이 된다. 말이 박물관이지 너무 많은 유물이라 그런가 그냥 배치만 해 놓았을 뿐, 꼭 모조품을 전시해 놓은 듯 덩그러니 방을 메우고 있어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디아 게이트를 보러 시내로 향했다. 물론 커다란 버스를 타고 갔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어 차를 댈 곳도 없어 그렇게 차 안에서 차창 관람을 했다. 이 인디아 게이트 역시 역사가 있다. 제 1차 대전에서 죽은 인도병사들을 기리며 프랑스 개선문을 참고해 지은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은 인도인들이 영국에 협력하면 자치를 허영하겠다고 공언했고 간디도 그 약속을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인들이 단합하여 영국을 지원하도록 호소하였으나 대전 중 수많은 인도인들이 죽었고 전쟁이 끝났음에도 영국인들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압적이었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영국신사임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국제적인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역사적 사건들을 볼 때마다 의아함을 넘어 걱정스럽고 미운 생각이 든다.

국제분쟁이 일어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문제만 해도 결국 영국의 약속 불이행으로

아직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이 계속 대치하고 있지 않은가. 영국의 양면 동전 모습일까?

정말 뜻 깊은 인도의 문이었지만 버스타고 2바퀴만 돌았을 뿐 안타까운 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 9만 여명이 넘는 인도 병사들의 이름을 새긴 인디아 게이트 안녕! 인도가 독립을 했으니 그 희생이 결코 무색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며.

라즈파트 대로를 따라 저 멀리 대통령궁 오른 쪽 국회의사당, 왼쪽 방향 정부청사 모두를 눈으로만 도장 찍고 돌아서자니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지만 사실 어제 3시간만 잔 여파로 내 몸은 나도 모르게 버스에서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원래 여정에 아침 일찍 이슬람 사원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허비되고 전 팀이 탔던 버스가 고장 날 정도로 도로 사정도 안 좋아 일정에서

뺐다고 해서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 때 상태로는 정말 안 가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잠이 모자라니 정신과 몸이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음 일정 역시 인상적인 곳이기에 놓칠 순 없었다.

꾸뜹미나르 유적군.

정문 게이트를 통과해 한참 걸으면 오른 쪽에 큰 우물터 넘어 높이 27m 미완성 탑 알리이 미나르( 3대왕 알라 웃딘이 짓다가 죽어 미완성)가 있고 앞쪽으로는 이슬람 2대왕 일투미시 무덤이 있으며 왼쪽으로 그 유명한 꾸뜹미나르가 보였다.

12세기 말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의 술탄 꾸틉 웃딘 아이비크가 델리 정복을 기념하여 세운 거대한 승전 탑 이라는데 정말 높다. 높이 72.5M 지름 15M로 인도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첨탑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적군이란다.

정말 탑을 따라 계속 머리를 저치다 보면 고개가 뒤로 넘어갈 정도이다.

원래 꾸뜹 웃딘 아이바크 당시는 1층이었는데 나머지 3층은 그의 후임자 2대왕 일투미시가 완성하여 4층탑이 되었고 그 후 페로스 샤 투글라크가 탑을 복원하면서 4층을 헐고 붉은 사암과 흰 대리석을 이용하여 2개 층을 올려 5층이 되었다고 한다.

1층 15m의 지름은 점점 좁아져 5층 꼭대기의 지름은 2,4m에 불과하며 꼭대기에는 작은 돔을 얹었으나 1803년에 지진으로 허물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현지 가이더가 이야기 해 준 재미난 사실은 2대왕 일투미시 무덤 역시 원래는 지붕이 있었는데 자꾸 무너져 지금은 지붕이 없이 뻥 뚫린 상태였다. 그 때 당시 아직 돔을 쌓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었나 보다. 아마 꾸뜹미나르도 그래서 돔이 무너졌겠지.

이태리 피렌체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한 브루넬레스키가 1436년 처음 완성했으니 12세기 꾸뜹미나르 때는 아직 그럴만한 기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벽에는 코란의 구절이 새겨져 있어 볼수록 그림 같이 아름다운 탑이었으며 1982년 까지는 내부에 있는 327개의 계단을 통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나 좁은 통로에서 압사사고가 난 이후 현재는 내부 출입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아아 정말 안타까운 일, 통탄할 일이었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유적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보물 오파츠!

오파츠란 현대과학으로 해명이 불가능한 고대 출토물을 가르킨다고 한다.

높이 7.3m 지경 40cm 인 쇠기둥으로 제작 시기는 약 4세기로 보며 철함량이 99.99%로 현대과학 기술로는 주조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금껏 녹이 슬지 않는 철탑이라고 한다. 지금은 둘레가 둘러쳐져 있어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위대한 유적 꾸뜹미나르와 약간의 거리가 있을 뿐 같은 마당에 서 있는데 부조화의 조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4C와 12C 유적이 한 마당에 서 있는 이유가 있겠지.

우리는 항상 단체로 다녀서 몰랐지만 입장료가 250루피로 우리 돈으론 약 5000원

화장실 사용료가 20루피로 400원에 비하면 비싼 편인데 정말 많은 인도사람들이 관람하고 서로 사진 찍고 쳐다보고 웃고 기운이 다 떨어질 즈음 이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호텔로 가기위해 버스를 탔다.

인도는 누구나 알듯이 간디도 알고 마더 데레사도 알고 인도에 다녀오신 분들은 다 아시다시피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는 것을 모두 아실 것이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차창너머로 보이는 한 여자 아이가 고르지도 않은 인도(차도의 상대개념. 인디아 인도가 아님. 곰곰 생각해 보니 거기선 人道도 印度India가 맞기는 하다.)에서 덤블링을 하며 따라온다. 맨 처음엔 너무 낯설어 놀라고, 다음엔 점점 저 아이가 다치지 않을까 내 걱정이 되는데 결국 요구하는 건 차창 관람료였다. 가이더가 주셨다. 그게 인도였다.

인도가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민낯이며

인도가 해결하고 싶어도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민생의 문제이며

인도가 영원히 떠안고 가야만 하는 그래서 숙제처럼 보이는

인도의 얼굴이 사진기가 아닌 내 안에 찰칵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니까 인도의 각인은 사실 덤블링을 타고 내 안으로 들어왔다.

 

 

 

재 3일 : 2017년 2월 20일 월요일

 

같은 호텔에서 묵으면서 어제 밤의 짐을 또 옮기는 것이 약간은 귀찮고 바로 침대위로 골인하려는 욕심에 한국인 가이더님이 방을 바꿔 준다고 하셨는데도 괜찮다고 완곡하게 말씀드렸는데 현지 가이더께서 또 호텔에 말을 해 놓은 터라 우리는 또 한참을 기다렸다가 델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방으로 바꾸었다.(델리에서만 마지막이다. 여행 초이기에 확실히 밝히고 싶다.) 꼴찌면 어떻고 마지막 순번이면 어떤가 원래 인생이란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경우가 더 극적인 것을.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여행의 묘미를 즐기고 있었는데 한국인 가이더이신 서 이사님은 마음이 편하지 않으셨는지 그예 방을 바꾸어 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바꾸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오오오 바꾸길 정말 잘했네∽.

어제가 창고 같은 분위기였다면 오늘은 등부터가 럭셔리한 금빛으로 정돈된 트윈의 배열에서 갑자기 궁전(과장 조금 보태서)에 온 기분. 갑자기 피곤이 달아났다. 욕실로 들어가니 깨끗 깨끗. 델리의 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푹 잘 수 있겠다. 호호.

 

그렇게 보낸 어젯밤을 뒤로하고 그래도 국내선을 타야 하기에 일찍 일어나서 짐을 꾸렸다. 중간에 놀라서 깨긴 했지만 7시간 정도 잔 것으로 기억한다. 그제가 새우잠이라면 어제는 황제의 잠이라고나 할까. 네팔의 카트만두만큼이나 안 좋은 대기 상태를 머금고 있는 델리의 공기를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으로 인디고 인도 국내항공을 타고 바라나시로 향했다. 2시간 반 정도 간 것으로 기억한다. 비행기 안은 양쪽으로 3명씩 앉았는데 다행히 나는 창가 쪽 이어서 인도문명을 일으킨 인더스 강을 끼고 한 없이 나는 비행기의 흥분을 충분히 보고 느낄 수 있었다. Nice!

그런데 이상하게 인도의 강은 왜 뱀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일까.

코브라의 선입견 때문일까, 종교적인 의미로 완곡하게 해석되는 것일까.

그 강이 우리를 바루나와 아시강 사이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시 하는 도시 바라나시로 인도하고 있었다. 현지 가이더 이름도 우연하게도 바라니싱이며 그곳 출신이시란다. 그래서 성함의 뜻을 물으니 ‘즐거운’의 의미라 하신다. 또 한가지 다른 뜻으로 네이버에서는 ‘신성한 물을 차지한다.’이다. 참 종교적인 색이 다분하지만 인도의 매력이 넘치는 도시일 것이라는 생각에 무척 기대되는 곳이었다.

 

바라나시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서 우선 점심을 먹었다.

인도는 호텔로 들어설 때마다 보안장치가 있어서 공항에서처럼 일일이 가방 검사대를 거쳐야 한다. 그런 반면 인도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위해서 그런지 호텔 문 옆에 항상 터번을 두른 아저씨가 꼭 서 계셨다. 유달리 이 호텔의 터번을 두른 아저씨가 무척 키가 커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우리가 시내로 다니기 위해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데도 여전히 한결 같이 가방 검사를 하는 여자 분하고 같이 변함없이 사심 없이 웃고 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호의치고는 너무 자연스럽다. 아마도 본인 직업에 대해 무척 긍지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모습에서 진정으로 피곤이 풀리는 듯 했다.

또 다른 풍경 하나 더. 아까 점심을 먹기 위해 이 호텔에 들어오기 전 버스에서 내릴 때 인도라는 이미지가 또 한 번 꾸욱 각인되는 아이들이 몰려왔었다. 뭔가를 달라는 눈치였다. 햇빛에 그을렸다기보다는 원래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듯 했지만, 마른

체형에 아이들이 방금 자다가 깨어난 듯한 차림으로 어린애까지 안고 와서 손을 내밀었었다. 꾸질꾸질 했지만 그 커다란 눈망울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었다. 절실해 보였다. 델리의 덤블링 소녀에 이어 무조건 손부터 내미는 이 아이들은 단순히 인도인인가 아니면 누구의 이웃인가. 작은 사탕에도 금방 표정이 바뀌는 아이들 앞에 나는 왜 오늘 서 있는가. 웃으면서 돌아서는 그들 방식의 인사에서 이 아이들이 나를 가르치는 인도의 철학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보다 먼저는 내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숫자가 의외로 인도 내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나라 상감도 구제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오늘 그들 앞에 내가 서 있는 이유를 난 잊지 말아야 했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이 말하고, 애초부터 아무 것도 없는 작은 손를 내밀 때 나도 화답했어야 했다. 내 손도 언뜻 보면 비어있지만 나는 너의 빈 손을 잠깐 웃게 할 어설프게 쥐어진 주먹 진 손이기에, 활짝 핀 너의 손이 보자기가 되어 오늘의 승자는 바로 너라고.

바라나시 호텔의 점심은 정말 맛이 좋았다. 특히 나는 생선요리를 탕수한 듯한 요리가 맘에 들어 무척 많이 먹었다. 나중에는 없어 아쉬워 하자 뷔페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서 계셨던 분이 보고 일부러 한 접시 더 가져다 준다. 고마웠다.

바라나시 시내로 가기위해 호텔 문을 나서는데 그 터번 인도 아저씨가 정말 또 환하게 웃고 계셨다. 인도의 표정이 전부 이 분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우선 바라나시 시내로 나가기 전 사르나트 유적군 (녹야원)으로 갔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하셨다는 4대 성지 혹은 8대 성지 중 하나인 곳에 버스를 타고 간 것이다.

마침 성지순례를 오신 수많은 주황색 법복의 수도승들의 모습이 사르나트의 꽃이 만개한 듯한 모습으로 수를 놓으시며 다니시니 그 향이 우리에게 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여행 후 어떤 분이 사진을 찍어 밴드위에 올려 놓으셨는데 빨간 가방을 민 스님의 모습이 왜 이렇게 인상적이고 재미있고 웃음이 나는지 언발란스의 이미지로 하여 오히려 딱딱함과 권위적 분위기를 깰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부처님의 설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날 본 아소카 왕의 기둥이나 편히 잠든 개들의 모습 그리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져 다시 돌아와 탑을 시주해야한다는 소원의 탑 마지막으로 24시간 산소를 내뿜어 부처님의 수행을 도왔다는 보리수 나무들도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단연코 그 날의 최고의 인기상을 한 스님의 빨강 가방으로 정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웃을 수 있어 좋다. 스님 감사합니다.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시 나가는데

역시나 인도의 꼬마 철학자들이 또 몰려왔다.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먹을 것 챙겨 왔어? ” 릭샤를 타고 떠나는 데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해 희비가 엇갈린 아이들의 표정에서 미안함이 더 커졌다. 진정한 勝은 어디에 있는가.

종교인가 철학인가 현실인가

 

그래서일까? 내 마음이 흔들리고, 릭샤가 나를 뒤흔들며 우리는 길 위에 섰다.

갠지즈 강으로 가는 릭샤가 엄청 툴툴거리며 온갖 공해를 다 내뿜는데 인도의 공기 속에서 오히려 존재감이 더 들고 있었다. 너와 내가 부대끼는 가운데 나도 살고 너도 살아 있고.

4명씩 탔으니 5대에 가이더 2분을 위한 릭샤까지 아마 6대가 같이 달려 간 것으로 보인다. 가다가 한 대가 다른 길로 가는 바람에 이 쪽에서 소리치니 그 릭샤가 고개를 돌려 다시 돌아온다. 한참 후에. 그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매연으로 매퀘한 바라나시 시내를 소리를 지르며 다시 돌려오는 릭샤의 모습에서 웃음이 났다. 살고자 하는가. 여기로 오라. 이곳에서 살아남는다면 이 세상을 사는 것이리라.

릭샤에서 내려서도 정말 한참 동안 걸어 갠지즈강 근처로 갔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 정말 흙빛이다. 흙먼지의 흙빛보다 더 짙어 일몰 즈음의 갠지즈강은 어떠한 회오리도, 울림도, 떨어지는 물의 아우성도 없이 교교히 한 덩어리가 되어 정지된 물인 듯 담겨진 물인 듯 깊이만이 깊게 느껴질 뿐이었다. 살아있는 것인가. 사람들의 숨소리에 맞추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강 주위에 설치된 가트라는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강가로 내려갔다. 그리곤 바로 준비된 배를 탔다. 초등학교 다닐 정도인 아이들의 체구에서 어디서 어떻게 힘이 솟는지 우리가 타자마자 얼른 뱃머리를 긴 장대로 돌리고 모타를 돌린다. 아까 거리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자기 할 일에 열중하는 그 아이들의 표정에서 내가 본 것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기쁨이었다. 그 시간 대 손님들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기억으로 한 두 대의 배가 떠 있을 뿐이었는데 놀고 있어 언제 배를 돌릴지 몰라 그저 손 놓고 있을 제, 행운처럼 나타난 우리 일행을 다급히 맞는 그 아이들의 순진한 직업의식과 기쁨을 표현할 사이도 없이 할 일을 제법 재빠르게 옮기는 프로의식을 발휘하던 그 어린 소년 2명. 그래 너희들은 성공할거야. 작고 작아 고사리라고 불리는 그 손이 그 힘든 뱃일을 하느라 한쪽으로 쓸려도 너희는 지금 생각을 할 수 있잖아. 아마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희망과 신’

다행히 가이더가 소원을 비는 작은 꽃 접시를 바구니 채 사 주셨었다. 배를 타기 바로 직전. 우리 여행객 모두를 위해서. 하지만 바로 그 때 그 바구니를 팔던 소년 역시 바로 흥정을 하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바구니를 건낼 때에 그 표정 그 모습이 지금 이 뱃사공 소년 2명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버는 돈은 결코 많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그 날 하루를 마감할 때 신께 감사하지 않을까.

우리도 그랬다. 희망의 작은 꽃 접시 위 몽땅 연필처럼 키가 작은 초에 불을 붙여 고요한 갠지즈 강 위에 띄울 때 우리는 그들 신 , 우리 신을 따지지 않았다.

“오늘 감사합니다. ”

맞은 편 강기슭에 배를 대고 내렸다. 하얀 모래가 끝이 없다. 다다른 강기슭 역시 아이들이 달려든다. 한쪽은 열심히 설명하고 다른 한 쪽은 물건을 들고 혹은 사진을 찍어 준다하며 친절 아닌 친절을 베풀고. 우리와는 방식이 틀려 그 곳에서는 작은 돈이라도 버는 방법으로 작은 물건을 팔거나 사진을 찍어준다거나 혹은 마사지를 해준다는 식으로 해서 돈을 벌려고 하고. 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세계에서 땅덩이는 7위인데 인구는 2위라는 점. 그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살 권리가 있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갠지즈강 모래알 수 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항하사 (恒河沙 ) 10^52 인도의 갠지즈강 모래알의 수

불가사의 나 무량대수보다는 몇 수 아래지만 셀 수 없는 수를 말할 때 쓰는 말.

어떤 분이 하얀 비닐봉지를 하나 주신다. 얼른 담아 가라고.

넉넉히 담느라 만져 보니 얼마나 고운지 기분이 up 된다. 내친김에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어 모래에 가만히 올려보니 정말 부드럽다. 제법 걸어 지친 내 발이 활짝 웃는다. 항하사라 하지 않는가. 저기 우리 딸은 벌써 갠지즈 강에 발을 담그고 있다. 나도 항하사를 밟으며 강가로 가 강에 발을 담가 보았다. 차가운 격정을 실고 물거품을 뿜어대며 하소연하는 폭포도 파도도 아닌 그냥 물. 흐르는 듯 하지만 오히려 멈춘 듯한 물. 그 물의 속내가 보이지 않아 두 번 생각하게 하는 철학의 강, 갠지즈 강.

저쪽 시내 쪽 건물 사이로 떨어지는 해를 감상하며 이제 오늘은 문을 닫는다며 바라나시가 숨을 토해낼 때 우리는 다시 배를 탔다. 무한수를 밟고 생각의 강을 건너기 위해.

하지만 올 때와는 달리 항하사 모래를 담은 배는 움직여지질 않았다. 뱃사공 소년 둘은 기를 쓰고 애를 쓰지만 배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어둑어둑해지다 못해 깜깜한데 현지 인도 가이더가 바지를 걷고 밀다 배에 타지 못했고 남자 분들 몇 분이 작은 배에 옮겨 타 배를 돌리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함께 떠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무한 수 항하사를 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오래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현실이라는 공격세력이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모기. 갠지즈 강의 모기들.

인도에 핵무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인도의 모기기 더 강력해 보였다. 옷을 뚫고 한꺼번에 무차별 공격을 하는지 발이 계속 따끔거렸다.

“먹을 것을 바쳐라, 갠지즈강의 모래는 무한 수, 영원의 수이거늘 항하사를 가지고 누가 이 강을 건너갈 수 있겠느냐.”

심리전을 펼치려는 순간 저 멀리 하늘로 치솟는 불길이 솟고 또 솟는다.

바로 갠지즈 강 한 쪽 가트를 따라 누구나 볼 수 있는 개방형 화장터. 불길을 새어보니 거의 10개가 금방 찬다. 슬픔의 지친 사람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통곡의 소리 또한 없다. 인도의 사람들은 갠지즈 강을 닮아 울지 않았다. 다음 생을 기약할 뿐. 그렇게 가는 사람 역시 불꽃으로 타오르고, 그나마 남은 재 역시 여운을 내며 아쉬운 마지막 숨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었다. 다음 생은 카스트제도 위에서 태어나시길...

배에서 내려 오른쪽 화장터의 반대편인 왼쪽 가트 쪽으로 가는데 벌써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아르띠푸자 의식을 하고 있었다. 배위에서도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얼른 가트위로 올라와 앉아 있는 인도인들 뒤쪽에 자리를 잡고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카스트 제도의 맨 위 브라만 계급의 의식은 특이했다. 계속 향을 피우며 사제 7명이 동시에 한 칸씩 맡은 구역에서 일렬로 늘어서 춤을 추듯 특이한 불의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해 준다고 믿기 때문에 매일 저녁 강가 여신에게 이렇게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자못 성스러운 분위기다. 신께 다가가는 방식은 나라마다 독특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과연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신을 맞이할까 하며 인도인들의 표정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뒷모습만 하나 가득이다. 간간히 우리 이방인이 궁금해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들 역시 하루를 보내느라 지치지만 신이라는 희망을 안고 내일을 맞이하며 오늘의 나를 예물로 바치기 위해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몰이 되어 해가 더 멀리 바라나시를 뒤로 너무 빨리 가버린 듯 하늘은 까맣다 못해 흑빛이 되어 갠지즈강과 하나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인도의 릭샤를 타고 더 멀리 가 버린 듯 한 해를 다시 모셔오라고 릭샤 대신 브라만 사제를 붙들고 통역을 부탁하는 듯 했다. 내일이라는 해를 다시 보게 해 달라고. 그러면 오늘보다는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그런지 흙빛인 갠지즈강이나 하늘과는 대조적으로 여기 사람들이 모인 곳은 환하다 못해 음악은 축제분위기였다. 현실에 찌들린 그들의 얼굴은 스스로 뒤로하고 내일을 향한 염원으로 신께 엎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일어서 나오는데 가트 중간에는 흰 소도 떡하니 자리하나를 넉넉히 차지하고 다음 생을 논하고 있었다. 오는 길 한 쪽 편에서는 박물관에서 본 댕강댕강 잘린 손과 발을 가진 신들의 모습처럼 비참하기 그지없는 할아버지들이 길게 점점이 앉아있었다. 바라나시여 당신은 오늘 무슨 소원을 비셨나요. 저의 기도도 함께 올립니다.

미리 걸어 나왔다. 끝나고 나오면 나오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단다. 그래서 서둘러 나오는데 서 이사님이 잠깐 숨표를 주셨다. 짜이 차를 사 주시는 것이었다. 홍차에 우유와 설탕 향신료를 넣어 끓여주는데 작은 토기 그릇에 담아주셨다. 꼭 갠지즈 강 진흙으로 만든 듯 흙 맛이 코로 훅 먼저 들어왔다. 그리곤 부드러운 밀크티 맛이 달달하면서도 특이한 인도 향으로 뜨겁게 용암이 되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인도의 저녁 추위가 오히려 더 느껴지는 듯 했다. 안타까운 일은 그 토기 잔을 깨듯이 던져 한 번 사용한 잔은 재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까버라. 나는 너무 아까워 그대로 가만히 토기 잔 모아두는 곳에 두었지만 아마 액을 깨는 의식도 무의식중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해할 수밖에... 더하여 인도에서는 물이 귀하니 그 컵을 다시 씻을 수도 없다면 그 것이 더 위생적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바라나시의 냉기를 마살라 짜이 차로 몰아내고 릭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타고 오는 내내 인도의 교통수단이 총 동원이 되어 있어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라 차들의 잘난 척으로 도배를 한 듯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역시 길 위의 소들은 그 교통난에도 수행자처럼 버티고 있었고 자전거. 릭샤. 오토릭샤 ,겉으로 보기에는 좀 나은 택시나 자동차들도 함께 한 방향으로 가는 듯 하지만 얼마나 빵빵거리는지 귀가 다 멍멍거렸다. 그런 가운데 인도 사람들은 길을 잘도 건넌다. 서커스를 보는 듯 하지만 역시 아비귀환이라는 단어가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 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성스러운 도시의 저녁모습을 지나면서, 옆으로 늘어선 상점이 지나쳐 보이는데, 빤히 길 위의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상점 주인들이 꼭 무성영화처럼 돌아가며 내 주위를 맴돌고, 그 속에서 무질서의 질서를 찾던 나는 내 혼을 쑥 빼놓는 바라나시를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인식의 강을 떠도는 무한 수의 도시 바라나시와 갠지즈 강은 말이 없는데, 그 주위의 모든 여건들은 갠지즈 강이 말문을 열기라도 한 듯 무척 소란스러웠었지만 다시 가보고 싶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당연히 ‘예’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너무 조용하다면 인간세상이 아닐테니까.

 

 

 

제 4일 :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정확히 몇 시에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우리 모두 새벽 갠지즈강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식사 전 서둘러 다시 갠지즈 강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대형버스를 타고 근처까지 갔는데 어제 밤과는 대조적으로 무척 을씨년스럽다. 길 위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과 인도의 소들이 어우러져 밤 같은 새벽을 전혀 개의치 않고 한데 엉겨 바라나시 거리를 채우고 있는 듯했다. 매정한 회색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감이 넘치는 초록도시도 아닌 오히려 신이 얼굴을 돌려 도시전체가 흙빛으로 변한 듯한 분위기인 이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데 아무리 조용히 걸으려 해도 밤사이에 잠을 자던 흙먼지가 우리가 지나갈 때 더풀더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듯 했다.

우리는 아침 해를 맞으러 바삐 걸어갔다.

배를 타고 또 다시 소원의 꽃 접시를 띠우며 해를 기다리는데 6시가 좀 넘어서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해가 뜨기 시작했다. 아무리 멀리 달아났던 태양이라도 어김없이 해는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지만 흙빛 갠지즈강에서의 일출은 인류문명의 4대발원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해도 특별했다. 신이 최초에 진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오늘 하루도 우리는 신이 나를 빚어주던 그 시간을 기억한다면 새로 다시 시작해 볼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이 흙빛 갠지즈강 위에서 땡그랗다 못해 빨갛게 수줍게 피어오르는 태양의 빛을 볼 때 나도 모르게 그 분을 생각해 보며.

그 시간 다른 풍경으로 저 멀리에서는 브라만 동자승들이 모여 앉아 교육을 받는 모습과 그 아래 불가촉천민이 갠지즈 강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슬픔은 없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 뿐이었다.

 

태양의 벅찬 마음으로 흙빛으로 빚은 갠지즈의 아침 선물을 받아 오는데 한 애기 안은 젊은 여인이 계속 따라 왔다. 일행 중 부부되시는 어르신이 달러를 주니 그대로 가는 듯 했다. 그 분들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주셨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계속되었다. 그 소문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바라나시에 퍼진 듯 했다. 어느 사이 다른 애기 엄마가 그 분들만 계속 공략? 했다. 우리가 걸어가는 내내. 우리 뒤에서도 작은 소리가 들렸다. 신이 열 손가락을 깨무신다면 모든 손가락이 다 아프시겠지. 여기엔 타협이란 없다. 보이는 빈 손과, 걷지만 곧 사라질 우리 마음이 한 편의 드라마를 찍어 놓고 커트되어 우리 뒤편 갠지즈 강 속으로 침몰되고 있었다. 그것이 내세이고 나의 미래가 될 것을...

우리는 서둘러 인도 바라나시 공항에서 카주라호로 가는 인도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정말 감사한 일은 매번 공항에서 현지 가이더나 서 이사님이 짐을 도맡아 처리해 주신 일이었다. 인도항공은 15Kg을 초과하면 안 되어 따로 가방을 만들거나 다른 동행 가방과 1/n을 할 수 있도록 다행히 척척 알아서 해결해 주시니 나 같이 짐에 쓸려 다니는 사람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카주라호에 도착해서 바로 서부 사원군으로 갔다. 일명 에로틱 사원이다, 현지 가이더 말에 의하면 서부사원군은 거의 힌두교 사원으로 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너도나도 수도승이 되어 여자들도 결국 결혼을 못하게 되고 아이도 없는 사회가 자꾸 만들어지므로 요새 말로 민원이 늘어나자 여기 사원에 미투나상 (남녀교합상)을 만들어 수도승들이 그것을 보고 결국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일행 중에는 우리 중학생 딸 말고 중학생이 한 명 더 있었다. 우리 딸이 맨 처음 인천공항에서 서로 얼굴도 모를 때 어른이 아닌 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우리 딸 포함 4명이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매일 나서는 여행마다 어른들만 하나 가득이지 또래를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사실 학원 다니기 바쁜 시대라 기대하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이번 케이스는 얼마나 행운이었던가. 알고 보니 여대생이 2명 , 여중생 2명이어서 우리 딸이 속으로 얼마나 좋아하던지 내내 말할 기회를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청천벽력과도 같이 여기 카주라호에 오기 전 서 이사님 말씀이 중학생 딸들에게는 이 곳을 보여줘야 말지 모르겠다는 말씀과 함께 이사님 의중은 아무래도 X에 한 표를 두고 계신 표정이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 작품이요 보고도 모르는 어른들도 있는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보지 못하게 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어르신 말씀도 참 재미있어서 여기 남기고 싶다. “아이들이 우리들보다 100단이여.” 진리이다. 그러나 동행한 여학생 어머님 생각은 달랐다. 결국 중학생 둘은 에로틱 사원 설명을 듣지 못하고 매점에서 맛있는 음료수를 마시며 기다리다가 어른들의 설명이 끝난 후 불러들여 같이 사진을 찍는 해프닝을 벌였었다. 나체가 예술이 되는 장소와 때가 있으니 역사속의 의미 역시 보는 사람에 따라 수위조절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신만이 아는 것이라 여겨지지만 인도의 어린아이들도 와서 보며 지나가는데 중학생은 그 수위에 걸리는 것일까 아직도 알쏭달쏭하다.

그나마 탑이 멋있게 하늘 위로 나비춤을 추며 뻗은 자태를 배경으로 딸아이와 사진을 남길 수 있어 그저 그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내쉬웠다.

다른 외국인들도 사진을 찍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배경이 좋은 point는 누구나 알고 있어 그런 지점은 아주 인기가 높아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고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인도를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는 모습이 무슨 큰 의미가 없더라도 하나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더 즐거운 여행이 되었었다. 특히 이 사원군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리핀 상이었다. 한 마디로 착하게 생겼다. 둥글둥글해서, 페르시아의 권위적인 그리핀 상이나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떠올린다면 무서워 보이지 않아서 친구 같은 이미지였다고 말하면 인도의 그리핀이 서운해 할까.

오히려 오는 손님마다 장난을 치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순진한 표정의 그리핀에게서 정감이 느껴지니 아무래도 신전을 지키는 그리핀이 아닌 신이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수호상이었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며 한 사원 안으로 한참 올라 들어가니 힌두 신이 모셔져 있는 작은 탑이 안에 또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내려 왔다가 다시 사람들이 빠진 후에 다시 올라가 보니, 그 신전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인도사리를 입은 한 프랑스 여인을 보고 자기 신을 위해 시주를 하라고 사인을 보낸다. 손짓으로. 어이없어 얼른 나왔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몇 번 있었지만 마음에 우러나서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닐 때 기분은 별로 좋지 않은 법이다. 갑자기 무슨 법? 내 마음의 법~^^

딱 걸린 프랑스 여인이 불쌍해 보였다. 급히 가방을 열어 꺼내려는데 가방이 뒤집어지는 모습을 보았기에 한 번 더 쳐다보며 그 곳을 아듀 했다.

이어서 힌두사원 뿐만이 아니라 자이나교까지 볼 수 있는 동부 사원군으로 갔는데 자이나교는 금욕적 이상을 추구 했으므로 에로틱한 미투나 상은 없지만 원래 수도승들이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사원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 수도승의 벽화가 정면에 커다랗게 모셔져 있었다. 인도에서 80,5%가 힌두교인 반면 겨우 0.4% 뿐이 안 되는 교세이지만 그래도 이색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사원내로 들어서자마자 어떤 안내인이 친절하게 여기도 찍고 저기도 사진을 찍으라고 하더니 결국 돈을 내라고 한다. ‘그래~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남의 벗은 몸을 보았으니 ...’

곧바로 전통 민속공연을 관람을 하러 떠났다. 눈이 크고 까메서 더 예쁜 인도 여인들과 상기되어 열심히 뛰어다니는 인도 남자들의 합동 춤을 보면서 졸리기도 하지만 이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무대가 너무 좁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내내 졸았다. 앞쪽 줄에서 보았는데 무희들이 춤을 출 때 인도인 특유의 각이 지는 손 모양과 발의 모션이 어떻게 연이어 선을 만들고 공간을 채울까 열심히 보다가도 남자 무용수들이 하늘을 날듯이 한 바퀴 돌때마다 무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 하기도 했다. 다행이 그런 일은 없었지만 인도의 민속공연을 보았다는 점이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화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근간이니까.

호텔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된장국이 나왔다. 얼마나 맛있는지 짜거나 말거나 아마 3그릇 먹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 이사님이 미리 한국에서 준비를 해서 가져가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한국식으로 호강을 한 것이었다. 아무리 호텔식으로 먹는다 하더라도 우리 입맛이 요구하는 우리나라 맛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오늘도 행복하게 꿈나라로...

 

 

제 5일 : 2017년 2월 22일 수요일

 

해는 어김없이 떴다.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을 나와 버스를 탔건만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 걸, 나와 우리 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희희낙락하며 웃으며 버스를 타고 그 호텔을 바이 바이하고 있었다.

거의 4시간 동안 버스로 오르차를 향해 이동하는 중에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좋기만 했다. 움직이지 않고 내 발로 걷지 않아도 저절로 차창의 화면이 실제로 바뀌며 인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시골 여기저기의 참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특히

대로에서 땅을 파서 뭔가를 할 때 흙을 나르는 건 이상하게도 여자들이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얼른 손을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나도 모르게 ‘허리 조심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참을 더 가다가 정오를 지날 무렵으로 기억을 한다.

건조한 먼지가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 내장을 파고들어 급기야 우리 코에까지 서슴없이 여과 없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가면서 보니 오른쪽으로 시멘트 공장도 보인다. 당장 민원이 들어오고 NIMBY현상이니 하면서 그 흔한 플랭 카드 하나 없이 아니 우리 손에 들린 작은 마스크 하나 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인도인들의 눈에서 ‘우리는 그런 거 몰라요. 우리는 살기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이예요.’ 하는 무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2017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면

과연 우리나라도 저런 때가 있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아침은 호텔식으로 나왔지만 더 자고 싶어서 안 먹고 떠났더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선 호텔 내 레스토랑은 아까 먼지와는 대조적으로 고요한 휴양지 같은 분위기로 우리는 맛나게 아주 맛나게 식사를 했다.

오르차 고성.

지금 다시 떠올려 보아도 고즈넉하고 조용하면서도 넓디 넓어 끝이 저기 하늘 끝에 닿아 보이는 조용한 도시이며 그래서 그 자체로 오르차 고성들은 은근히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무게감으로야 땅에 기초를 둔 것이 맞지만 그 붉은 사암이 세월로 닳아져 아련한 기억을 전해주는 데는 오히려 100% 진실성이 있어 보였다.

왕이 여기서 하루를 살았다 할지언정 왕은 이 곳을 왔었고 전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역사의 시간도 함께 실어갔지만 13년이나 걸려 지어진 오르차 고성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는 듯 이제는 나이들은 민낯에 홍조를 머금고 있었다. 세월에는 진실이 있다. 그래서 오르차 고성은 더욱 정감이 들었다. 떠난 님이 다시 올거라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 자체로 그 때를 곳곳에 담아 두고 사람들에게 보물 찾기를 해보라는 듯 손보지 않은 그대로 현장을 보존하며, 오르차 고성 자신은 뜷려 있는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님이 가신 방향을 한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느낌은 바로 내가 오르차 고성인 라즈마할과 제항기르마할에서 바람이 전해 준 것을 마음으로 받아 적은 것이다.

바로 이래서 나는 여행을 사진이 아닌, 가서 직접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분명 동기와 추억이 될 수 있기에 충분히 자기 본분이 있지만 더 친밀하게 사실을 전해 듣고 싶다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힘이 들지라도.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다.

집에 오면 실컷 잘 수 있지 않는가...

역사 속으로 그것도 인도 고대의 궁전 속을 다녀와서 그런지 약간은 침잠하다고 할까 차분했다. 아그라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지쳐 보이는 듯 했지만 마음은 그 고성의 매력에 빠져있는 듯 했다. 약 1시간 쯤 걸려 잔시 역으로 왔다. 이제 여기서 기차를 타고 아그라까지 간다고 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우리가 몰랐던 잠재된 폭탄은 여전히 가방 속에 있었고 새로운 불발탄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 딸이 안경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핸폰을 버스 안에서 발견하였기에 버스라고 생각하고 온 인력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버스를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일행이 古城에서 찍은 사진을 돌려 보고 아무래도 고성에 놓고 온 것 아닐까 하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잔시의 기차역은 굉장히 이색적이었다. 꼭 아가사 크리스티의 터키 이스탄불 기차역을 보듯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평범하지 않은, 인도에 있기에 뭔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의 역. 그래서 그랬을까. 우리 딸과 나는 기차가 연착되는 1시간동안 계속 안경 찾기 탐정 놀이를 하며 안타까움과 앞으로 타지마할을 안경 없이 어떻게 볼 것인지, 엄마인 나는 딸아이의 실수가 화가 나려는 순간 동행하신 분들의 격려와 다독임 속에서 그런대로 무사히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이 여행에 올수 있었던 것 자체가 딸 덕분이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안경은 鳥足之血이 아니었던가.

아빠에게 말해 여행을 올 수 있었던 것이 첫 번째 고마운 일이고 떠나기 전 여권을 챙기지 않아 난리를 피운 장본인이 엄마인 나라고 상기해 보면 이 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는데 여전히 속으론 끌탕을 하면서 겉으론 웃고 있었다. 그래도 많은 일행 분들의 관심으로 나도 이제 속을 털어냈었다. 원래 여행 올 때는 안경을 하나 더 준비해 오는 거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체크 포인트는 결국 엄마 책임으로 귀결이 되는 것이니 이번에도 엄마인 나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게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 맞다. 하나를 더 준비해야하는 거였구나. 사실 엄마의 개인 역사가 말해주는데... 잃어버리면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엄마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 같아. 이해해 줄래? 엄마 딸!’

서둘러 오르차에서 나왔는데 1시간 더 연착이라 내 기억으로 어둑어둑할 때 기차를 탔던 것으로 안다. 원래 인도 기차는 연착하기로 악명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한 시간을 더 기다리고 타는 것이었다. 그것이 행운이라니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정시키고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여유는 어디에도 없으리라. 안경은 꼭 필요했지만 이제는 접어야 했고,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1시간은 기본이지 하며 감지덕지하며 기다려야 했다. 차라리 우리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충분히 안경 찾기를 했으니.

정말 높았다. 인도역사의 지붕이 높고 그 사이 철길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시 높아 칙칙한 역사에서 그래도 숨을 쉴 수 있는 바람이 통하고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래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그리고 철길 위에서 유유자적하는 소의 모습을 보면서 딸아이와 어깨를 맞대고 서운한 심정을 토로하다가 이제 그만 정리하자며 손을 꼬옥 잡았었다. 마음이 정리 되면서 인도역사가 다시 보였다. 아까부터 계속 따라 다니는 남자 아이에게 뭔가를 준 것 같은데 그 아이는 우리 일행 주위를 꾸준히 돌고 있었다. 아까 주었다고 말했지만 그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날 기억 하겠는가 더욱이 그 아이도 그 날 일당을 채워야하지 않겠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만나고 싶었던 아가사 그리스티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오리엔탈 특급열차를 타듯 우리는 인도의 기차를 타는 행운을 얻었다.

인도에서의 2번의 국내 비행기와 누구나 타 보고 싶어 하는 인도 기차여행.

그리 깨끗한 신형 기차는 아니지만 저녁을 날라다 주는 도우미 소년이 있어 연신 뭔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심지어 컵라면을 주면 뜨거운 물을 담아 다시 가져다 주어 인도 기차 안에서 먹는 그 면과 국물의 맛은 정말 최상의 조건에 최상의 장소에서 아주 적절하게 라면의 진미를 살려 주고 있었다. 카레요리가 주가 된 인도요리에 칼칼한 라면 국물로 속을 청소하고 나니 뿌듯한 마음에 한껏 늘어질 수 있었겠지만 기차 안에서 달밧 요리 같은 인도 도시락 서비스 이후에도 아이스크림을 주는데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었기에 기차의 낭만을 즐기기보다는 먹다가 내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 먹고 나니 Tip 접시를 돌린다. 아까 그 소년이 파란제복을 입은 것이 그제야 눈에 띠었다. 기꺼이 주었다. 역마다 타고 내리는 손님이 다른데 그걸 다 기억하고 물, 도시락 ,아이스크림을 우리한테는 특히 뜨거운 물까지 연신 가져다주느라 작은 손을 쉬지 않고 봉사했으니 당연한 보수였다. 더하여 살려는 노력과 의지가 있으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인도의 밤은 기차 뒤로 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그라역에 도착했어도 밤은 연신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호텔에 들었다. 호텔 구조가 2개의 객실을 맞붙여 놓은 문이 있는데 열리지 않도록 문고리가 보였지만 말소리가 잘 들리겠구나 하는 노파심이 생겼었다. 하지만 피곤하니까 서로를 방해할 일은 없겠지 하면서 짐을 펼치는데 갑자기 우리 딸이 노란색 머플러가 없다는 것이었다. 몽골여행 때 우리 딸이 사고 싶어도 경제사정 때문에 못 사는 것을 보고 ‘다시 오면 좋지만 진짜 올지 말지 알 수도 없는 몽골인데 그냥 사자.’해서 그렇게 좋아라하면서도 계속 아끼느라 제대로 걸치지도 못하다가 이번 여행에서 요긴하게 쓰려고 가져왔는데 결론은 어제 호텔에 두고 온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었다. 그런 결론을 내기까지 가방을 발칵 다 뒤졌었다. 아까 인도 역에서 안경 사건으로 가다듬은 화는 화약고에 기름을 부은 듯 폭발하고 말았다. 인도를 누구 덕분에 왔던가. 그런 생각은 이미 물 건너가고 이제는 둘만이 남은 호텔방에서 지원사격을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아까 터졌던 불발탄과 심지에 불을 부친 가방 속 숨겨져 있던 폭탄은 1초의 간격도 허락하지 않고 바로 호텔방을 날려버렸다. 계속 호텔방 중간 문이 신경이 쓰였지만 이미 우리 모두 폭탄의 후유증으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상처만 남은 채 아그라의 밤은 더욱 더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제 6일 : 2017년 2월 23일 목요일.

 

아그라 하면 생각나는 것은 단연 타지마할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명 타지마할 일출을 보러 나왔다. 싸늘해서 겉옷은 한국에서 입고 온 털실 스웨터를 걸쳤다. 어제의 마음을 실어서인지 걸음이 무거웠다. 하아얀 타지마할의 강 반대편 메탑 바그에 사쟈한 왕이 까맣게 똑같은 마할을 지으려 했지만 무산되어 빈터로 남아 있는 곳. 실제로 세워졌다면 고즈넉하니 아내 뭄타즈마할을 기리기에 충분히 운치가 있는 장소임에 틀림이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까만 타즈마할이 존재 했을거라는 가정 하에 한 고고학자가 실험을 해 보았었는데 아마도 타즈마할의 그림자를 그렇게 표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왜냐하면 검은 색 돌 파편 하나가 지금껏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 반대편 멀리 신기루처럼 떠 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왼편으로 뜨는 해를 놓칠세라 순간을 포착하는 순간 달구어진 해의 주위가 먼저 하늘을 밀더니 빨갛게 새로 태어난 태양이 달걀노른자처럼 봉긋 솟는 순간 타지마할은 그 본연의 색을 더 밝고 하얗게 빛내기 시작했다. 7가지 무지개의 빛을 한 순간 한 겁으로 보내는데 그 신비의 타지마할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저 아래 기둥부터 타지마할 꼭대기까지 서서히 그 기운을 받아들이며 반짝거렸다.

샤자한의 노래가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뭄타즈는 그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듯 마음껏 태양이 주는 빛의 파장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오늘도 새롭게.

 

이제 잠이 다 깼다. 타지마할의 신기루가 사라진 후 발걸음을 옮기는데 버스만 떴다하면 나타나 원 달러를 외치는 인도 소년들이 어김없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아 보였다. 잠도 안 자고 눈 빠지게 관광객을 기다렸나보다. 측은한 마음이 들 이때 흑기사가처럼 서 이사님의 활약이 눈에 띠었다. 필요한 사람은 적당 가격에 살 수 있게, 인도아이들은 하나라도 팔 수 있게 연결시켜 주셨던 것이다. 나도 사실 1달러에 우편엽서 첩을 하나 샀는데 얼마나 들고 있다 팔았는지 꼬질꼬질하기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바꾸려고 창밖을 보니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버스는 아침이 고팠는지 벌써 떠나고 있었다.

그래 인도애서의 확실한 기념품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 뇌이며 돌아왔다.

어제 우리 객실 옆방은 과연 누구였을까? 물어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아침을 채우고 곧바로 타지마할로 가지 않고 우선 오전에는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인 악바르 대제의 묘지이며 타지마할의 모델이 된 시칸드라를 방문하였다. 계속 현지 가이더가 ‘아크바르’ ‘아크바르’ 하길래 그런 왕이 있었나 보다 했었다. 그런데 다시 한국에서 동행한 서이사님이 악바르라고 알려주시자 그제야 아아! 하면서 이해가 되었고 관심이 생겼다. 13세에 왕위에 오른 후 섭정을 받기는 했지만 18세에 완전히 섭정을 누르고 왕이 되어 정적들에게 자비와 무자비를 동시에 보여 주었으며 영토를 확장하였고 특히 종대적인 관대정책으로 그의 묘 역시 4개문이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 지어졌다고 한다.

본인은 이슬람교이고 부인 중 한사람인 조다는 힌두교인으로 ‘조다 악바르’라는 2008년도 영화를 오래 전에 본 터라 더 귀거 솔깃하여 들으며 보게 되었다. 큰 문을 들어서 보면 안의 정원에는 인도 사슴 바라싱가가 뛰어 놀고 있고 또한 성스러운 묘안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비둘기가 날라 다니기 바빴다. 그래도 우리는 숨죽여 사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천천히 둘러보고 조용히 나왔다. 정말 규모나 모양은 아까 아침에 본 타지마할에 비해 ‘미니 타지마할’이라 불릴 만 했다.

그리곤 악바르 대제가 만든 아그라성으로 갔다. 들어가 올라가는 길이 사뭇 다르다. 문에 들어서면 대개 앞이 탁 트이는게 일반적 건축양식인데 여기는 양쪽으로 높은 벽이 30도 정도의 비탈길 위로 뻗어있었다. 그리곤 우리를 맞는 오른 쪽 큰 정원과 성이 확 우리 눈에 든다. 여기부터는 특이하게 사진기를 든 사진사가 줄곧 나타나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신속 정확하게 바로 나왔다. 어어? 보기보다 정말 잘 나왔다. 아까 개인 사진도 찍으라고 했을 때 안 찍은 것이 후회될 정도로.

다른 편으로도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는데 정말 이 곳은 깨끗하게 정리 되었고 새 단장을 한 듯 인도의 멋이 살아 있었다. 한 테라스에서는 멀리 우리가 이따 가까이서 보게 될 타지마할이 아련히 보여서 오히려 안타깝기만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손끝에 실체가 느껴지지 않기에 더 애가 닳는 곳이었다. 그렇게 아쉬워하며 빨리 타지마할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에 계셨던 서 이사님이 우리 일행을 세우셨다.

‘지갑 챙겨보시고, 조심하세요.’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 했지만 옆을 보니 청년 몇 명이서 지갑을 들고 웃으며 걸어갔다. 언뜻 보기에 갈색 장지갑 같아 보였다. 항상 관광지에는 있는 일이지만 여기 인도도 어김없이 있었나보다. 자기 들은 웃겠지만 누군가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애가 탈까.

물가의 사슴이나 기린, 물소 등 모든 동물이 목이 타는 갈증을 물을 마시며 잠시잠깐 방심하고 있을 때 하이애나를 대동한 육식 동물인 사자나 호랑이가 나타나 눈 깜짝할 사이 원하는 것을 잡아채가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 주위를 계속 따르며 걷고 있는 것이 영 신경이 쓰여 몸이 아닌 가방을 사리며 그 곳을 빠져 나오기 바빴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정말 좋겠다. 정말 좋겠다.

 

이상하게 점심을 먹은 기억은 나지 않고 우리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타지마할로 들어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떠한 것도 반입이 안 된다. 날카로운 물건, 음식물, 손전등 심지어 볼펜까지 그저 눈으로만 감상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래야지. 그래야 오래오래 보존하고 후손들이 길이길이 감상할 수 있도록.

우리가 놀이동산을 가면 그쪽에서 편의상 내어주는 셔틀버스를 타듯 여기서도 우리는 그렇게 입구까지 들어갔다. 현지 가이더는 우리에게 작은 물 1병과 하얀 덧신을 주었다. 들어가기 전 나무 밑에서 다시 인원 점검을 하고 짧은 유의사항을 듣는데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계속 사진사 3명이 사진을 찍으라고 간곡히 매달리기도 했지만 마음이 벌써 콩밭에 가 있는데 어떠한 말도 이제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드디어 개선문(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임, 전혀 닮지 않았음)처럼 보이는 커다란 문을 지나는데 그 문의 그림자로 하여 잠깐 검은 베일이 쳐지는가 싶더니 그 사이 정면에 하야디 하얀 타지마할이 순간 자리를 차지하고 나타났다. 헉 하는 외마디가 절로 나오는 진품의 인도 타지마할. 이제 드디어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너무도 아름다운 자태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너무나 깨끗한 이미지가 더하여 꼭 매끄러운 눈의 나라 여왕의 성 같기도 하고, 언제든 나타나 하얀 이를 드러내며 분부만 ‘내리십시오’라고 외치는 알라딘 램프 지니의 작품 같기도 한 동화 속 나라 주인공들의 거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언제든 하얀 구름이 내려오면 그 구름을 타고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생각에 얼른 사진을 찍었다. 찍고 또 찍었다. 다행이 구름은 없었지만 사진을 찍는 손만큼이나 발걸음도 바빠졌다. 1시간 반 정도 비교적 넉넉한 자유시간을 주었지만, 1632년부터 22년간 들여 만든 이 건물을 그 시간에 본다는 것은 결국 무리이겠지만 노력은 해 보아야 했다. 자유시간 전 인도인 가이더가 문제를 냈었다. ‘인도 둘째날 델리의 꾸뜹미나르와 이 타지마할과 어떤 것이 더 높을까요?’

마음도 급한데 알송달송 문제로 발걸음이 감겼다. 한국에 돌아와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꾸틉미나르가 72.5M인 반면 타지마할은 65M인데 현지 가이더는 타지마할이 더 높다고 했다. 아무래도 기준이 다른 것 같다. 왜냐하면 타지마할은 강 옆이기에 단단한 지지기반을 만들어 올렸기 때문에 그 지지기반에서 시작한다면 답이 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봐도 꾸틉미나르가 더 높아 보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새라면 새, 나비면 나비가 되어 저절로 움직이듯 타지마할로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그리고 왼쪽으로 가야 외국인 전용이라 빨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타지마할 앞 연못을 지나치면서는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이제 덧신을 신고 마음을 가다듬고 첫 발을 조심히 내디고 둘째 발부터는 정상적으로 어떻게 저 꼭대기까지 오를까 생각했는데 타지마할 본관에 들어섰다. 모든 것을 자연광에 의존하다보니 싸늘하면서도 약간 어두운데, 관광객들은 엄청 많아서 어디로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 그 찰나 갑자기 나타난 인도인 지킴이 아저씨가 사람들에게 호루라기를 불며 뭐라 하시더니 갑자기 우리더러 이리 와 보란다. 손짓이 그랬다. 얼떨결에 갔다. 뭐 주의를 주려나 보다. 그래 들어나 보자. 뭐라고 하는지. 그런데 아저씨 태도가 갑자기 친절했다. 손전등은 분명히 안 된다고 했는데 지킴이 인도인아저씨의 손에는 작은 후레쉬가 있어 그것으로 벽을 가르키며 보라고 했다. 다이아. 사파이어, 루비란다. 하얀 대리석 사이사이 보석을 박아 놓았다. 햇빛이 좋은 오후라 하더라도 이 안은 그렇지 않기에 손전등을 대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밤하늘에 별빛이 보석보다 아름답다 하더라도, 인간이 만든 작은 하늘에 손전등 달빛이 여기저기를 비추며 인간의 팔로 한 바퀴를 도니 그것 역시 작은 우주가 되어 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 순간 그 보석 별들이 한 폭의 사리가 되어 내 주위를 옷감인양 착 안겼다. 훗.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대관식에 참석한 것처럼. 그런데 여기 누워계신 뭄타즈마할은 샤쟈한 왕과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는 의미로 이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했다니 정말 지혜가 이 보석별만큼이나 반짝반짝하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뛰어난 미모는 아니더라도 무척 지혜롭고 총명하여 왕이 항상 전쟁하러 나갈 때에도 동행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라면 이 대리석 하늘의 보석 별들은 그녀의 상징이 되겠지. 영원히 빛나는 총명의 상징으로.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하게 뭄타즈의 지혜로운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그 친절하던 인도인 지킴이 아저씨가 손을 내민다. 루피를 달란다. 달러뿐이 없어 달러를 주었다. 1달러에 인도의 천국을 경험했으니 아까울 것은 없으나 그 안은 그런 분이 2분 정도 더 계셔서 노골적으로 그렇게 원하고 있었다. 천국과 현실은 언제나 함께.

그리곤 우리 딸보고 빨리 위로 올라가자 하며 오르는 계단을 찾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 본관 가운데 묘가 있는 공간이 전부였다. 꼭대기까지 오른다는 생각을 나는 왜 한 것일까. 다리에 힘을 주어 오를 각오로 준비를 야무지게 ‘얍’ 하고 있다가 맥이 풀려 타지마할 밖 대리석 바닥에 주저 않았다. 40M인 4개의 미나레트가 날개인 듯 타지마할은 오묘하게 떠 있는 듯 했다. 높은 문 위로 연신 비둘기가 날라 다니지만 그 동선으로 눈을 옮기다 하늘을 보아도 역시 그 빛은 단순하면서도 자체 내면의 빛이 밖으로 전해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혜의 아름다움을 띠고 있었다.

잠깐! 이 건물은 통째로 대리석이 아니라 벽돌로 먼저 쌓은 후 대리석을 덧댄 것이라 한다. 당시 코끼리 1000마리가 가 우리가 앞으로 갈 라자스탄에서 대리석을 나르고 페르시아 출신 건축가에 이탈리아, 프랑스 장인들까지 동원하여 지금 돈으로 환산하여 약 720억을 들여서 지었다니 인도하면 타지마할을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장인들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보고 또 보고 계속 보아도 이 마할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아름다운 날개 짓으로 만들어 놓은 양 하나도 어긋나거나 허튼 틈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얀 선녀들의 손길이 차갑게 바람으로 불어와 우리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서 한 없이 바라보다 다시 일어나 한 바퀴를 다시 돌아보니, 성은 안차지만 그래도 그 시간 안에 내가 가져가는 기억의 공간은 확보가 되었고 좀 더 선명해졌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샤자한이여! 당신은 당신의 흐르는 눈물을 깨끗이 닦아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들어 세웠으니

하늘도 감동하여 눈처럼 하얀 색을 내리셨나 봅니다. 이제는 마음을 놓으소서. 어느 누구도 당신의 마음이 까메진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반대편에 검은 마할을 세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마소서. 하나면 모아지지만 둘은 여전히 멀고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타지마할을 나오는데 남는 발자국 없이 그 길 위에 여운만이 흩어지고 아까와는 달리 여러 박자 느린 걸음으로 다음 장소로 향했다.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오늘 새벽은 타지마할 반대편 야무나 강 건너편에서, 그리고 다시 아그라성에서 멀리 바라보고, 방금 전에는 진정한 타지마할 본체를 가까이에서 보고, 지금은 인도 주택가 안 3,4층 정도의 옥상 카페에서 해넘이를 보기로 한 것이었다.

옥상의 옥상으로 오르기 전 화장실을 갔다. 깨끗할 것으로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밖에는 손을 씻을 수 있는 수도도 있어서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다 나온 뒤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을 보았다. 당연히 인도인이었다. 불가촉천민일까. 변변한 도구도 없이 어떻게 양동이 하나에 걸레하나로 화장실 바닥을 닦고 있는지 수세식도 아니었는데 인도인 특유의 검은 피부에 더 까맣게 마음까지 타들어간 듯 한 그 분 모습이 내 마음에 찍혔다.

그 분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밥이나 먹으며 제대로 대접이나 받고 사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분 역시 인도의 한쪽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옥상으로 왔다.

다른 분들은 맥주 우리는 맛있는 콜라. 해가 진다. 타지마할이 정면이라면 왼쪽 8시 방향 쪽으로 해가 진다. 웃음이 나는 건 바로 그쪽 어느 주택 옥상에 원숭이가 떡 버티고 앉아 해넘이를 보는 듯 꼬리를 늘어뜨리고 한참을 앉았다 사라졌다. 여기 인도타지마할에서는 원숭이가 철학자처럼 보였다. 인도에는 철학자도 많다. 아마도 인도의 여러 神 중에서 하누만 신이 원숭이라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길 가의 코끼리며 낙타며 소며 원숭이며 새들을 생각할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인도는 동물들의 천국이며 인도전체가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아주 적합한 나라로 보였다.

해넘이로 해서 프리즘의 색을 흡수하는 타지마할의 얇은 사리들을 한겹 한겹 감상하며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은 부부되시는 분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아뿔사! 말씀은 안 하시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어제 우리 호텔 방에서 폭탄이 터질 때 옆방에 서 주무신 분들이 아무래도 이 분들이신 것 같았다. ‘띠요띠요’ 하며 머리 속을 맴도는 앰뷸런스의 급한 외침이 들렸다.

'어젯밤 시끄러웠지요. 죄송해요.‘ 라는 말이 속으로 맴돌았다. 한편으로는 ’에이. 아이가 있으실테니까 이해해 주실거야.‘ 라고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혼자 위로하며 그 순간 해는 완전히 떨어졌고 그렇게 타지마할의 점을 찍었고 말았다. 그 순간.

 

호텔로 돌아오는데 또 한 번 인도인을 경험하는 계기가 있었다. 인도인은 참으로 극과 극을 달린다. 4명씩 짝을 지어 마차를 타고 타지마할 구역을 벗어나오는데 그 흥분에 걸맞게 마부소년이 흥을 돋운다. 우리 딸에게 말 운전하는 법을 한 번 가르쳐 주더니 무조건 잘한다고 추워준다. 그러더니 나에게로 와서 또 그랬다. 아무래도 내가 팁을 줄 거라 생각했나보다. 그러더니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며 허리를 잡는다. ‘아~ 요 녀석 봐라.’ 달리는 마차 위에서 이 아이의 행태는 점점 영 불쾌하기가 그지없었다. 다행이 짧은 거리여서 금방 내릴 수 있었다. 노골적으로 Tip을 달란다. 여행객을 항상 그런 식으로 대접하나보다. 현지 가이더가 분명 단체로 줄 거라고 말을 해도 얼마나 성가시게 구는지 누구한테 저렇게 배웠을까, 순진한 인도소년을 관광객들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인도에서는 원숭이도 철학을 하는데 왜 저 아이는 자기 인생에 대한 자기 성찰, 자기 판단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일까?

하루 일당을 채우면 바르게 살까 싶어 1달러를 주었다. 그랬더니 더 달란다. 덕분에 나는 마차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타지마할 구름 속에 있다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관광의 환상보다 관광의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여러 겹의 비철학적인 밤이 나를 초대하는 꿀꿀한 마감이 되어 버렸다.

 

제 7일 : 2017년 2월 24일 금요일

 

오늘은 3월 15일 수요일 한국이다. 그 동안 인도여행 후에 집안일도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 인도 정리를 하는데 만만치가 않았다. 집안 일이 내가 없었던 만큼 밀려있고 , 더불어 내가 인도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 알고 싶은 부분, 뒤죽박죽 사진 정리하면서

발품을 팔아 보고 들은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니 시간이 모자라하며 지금까지 왔다. 사실 더 자세히 쓰고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러면 너무 지엽적인 것에 울타리를 치고 나오지 못할 까봐 거시적으로 여행을 훑어보려 했지만 아쉽고, 또 보고 싶고 벌써 그리움으로 置簿되는 장소들이 있으니 이 글을 써서 조금이라도 남기고, 기억하고픈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벌서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나다 보니 어느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고, 섞여서 순서가 고르지 못해, 사진기에 매달려 그 찍힌 순에 따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다행이 밴드라는 것을 만들어 동행하신 분들께서 올려주신 사진을 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아 이나마 쓰게 되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용기와 힘을 얻어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아그라에서 대형버스를 타고 다시 자이푸르를 향해 북쪽으로 갔다. 그 사이 악바르 대제 시절 잠시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파테푸르시크리를 방문했다. 옛 도시는 고즈넉하다. 들어가는 입구는 무슨 메마른 정글인양 손 보지 않은채 나무들이 흐트러져 자라고 있었고 그 사이 작은 흑돼지 3마리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 딸아이가 일부러 버스까지 뛰어가서 아직 먹지 않은 오렌지를 가져다 주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건 안 먹었다. 아마 과일은 안 먹나보다. 아까웠다.

한편으로는 일행 중에 아프신 분이 생겨서 3~4분 대형버스에 남아 계시기도 했다. 항상 여행 중에는 누가 아플지 누가 안 아플지 장담할 수가 없다.

10명이나 겨우 탈 수 있을까 싶은, 천장까지 낮아, 겨우 앉을 수 있는, 먼지를 털털거리며 가는 작디 작은 완전 시골 버스를 타고 파테푸르시크리 성 앞으로 갔다. 그냥 깨끗하게 청소는 되어있었지만 사막의 성 마냥 광활하고 건조하고 멀리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메마른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주인이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집이라 누구하나 돌보지 않는 버려진 성 같은 쓸쓸함이 곳곳에 베어 있었다. 물론 휴지하나 없지만 오래된 먼지와 색바랜 붉은 건물에서 악바르대제의 음성이 들리려나 하는 기대로 악바르 대제가 학자들과 경연을 하고 의견을 나누었다는 2층 제대 같은 곳에까지 연결되어 세워진 기둥에 귀를 대었지만 역시 과거는 현재를 넘어 오지 못하고 역사가 전하는 바람만이 가이더를 내세워 설명하고 있었다. 너른 안뜰에서 보니 커다란 인도 장기판이 보이고 저편에는 이슬람 부인을 위해 지었다는 궁이 따로 있었다. 모든 것이 역사만큼이나 조용했다.

설명을 들으니 무굴제국 3대 황제인 악바르 대제가 아들이 없었는데 이 곳에 사는 이슬람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가 후사가 있을 것이리라는 예언으로 그 성자와 함께 살고 싶은 맘에 이 곳 시크리에 궁과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궁은 종교 관대정책에 따라 이슬람, 힌두, 자이나교를 각각 믿는 왕비와 궁녀들을 위해 따로 따로 건물이 지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연못이 있었다. 결국 이슬람 왕비로부터 ‘자항기르’라는 왕자를 얻게 되어 악바르는 무척 기뻤을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의 이름도 승리의 도시인 파티푸르 시크리라 칭했다. 그러나 급수 부족과 역병이 돌아 결국 아그라로 수도를 옮겨 400년이라는 세월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니 더 관심이 가고 정이 드는 곳이지만 일정표와는 달리 우리는 왕궁만 보고 사원 쪽은 보지 않고 온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사원 쪽은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하얀 대리석 무덤도 있고, 이슬람 사원의 원형인 자마 마스지스도 있었다는데 아무리 사진을 뒤져도 없는 걸 보면 우리는 가지 않았나보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핑크시티 자이푸르에 왔다.

아마 예정된 4시간 보다는 적게 걸려서 온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보다 인도에 길이 잘 뚫려있었기 때문이다. 대형버스가 아주 신나게 달렸었다. 가면서 버스에서 보니 먼지 풀풀 나는 길 위를 가족들인지 아는 사람들끼리인지 모르지만 여자 분들이 예쁜 인도식 사리를 휘날리며 꽃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인도에서는 시바 신께 꽃을 바치는 축제일이라 그렇단다. 우리가 며칠 전 다녀 온 성스러운 흙빛의 도시 바라나시는 아마 발 디딜 틈도 없을 것이라 한다.

소소한 시골풍경이지만 특별한 인도의 한 문화를 직접 보았기에 무척 관심이 가서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얼굴표정들도 밝아보였다. 신이 좋아 웃는지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서서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인도의 웃음을 본 것 같아 나도 따라 웃었다.

 

라자스탄 주의 주도인 자이푸르는 온 도시를 담홍색 핑크로 색을 칠해 핑크시티다.

어느 호텔에서 점심을 먹는데 특별히 죽을 끓여 드시는 분들이 계셨다. 여행 자체가 긴장인데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댁에서 그때를 추억하며 웃고 계시겠지.

 

그 점심을 먹으려고 가는 도중 차창 밖으로 물위에 뜬 여름궁전이 보였는데 그냥 지나쳐 무척 아쉬웠었다. 그런데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았다. 왜냐하면 다음 날인 내일 가기로 되어 있었기에.

무굴 건축양식과 라자스탄 건축양식의 조화가 절묘한 시티 팰리스를 보려고 오토릭샤를 타고 올라갔다. 유난히 관광객이 많고 화려했다. 가이더 말로는 외벽 색칠을 야채를 이용해 천연으로 다시 칠했고, 항상 정기적으로 한다고 했다. 안의 벽화도 화려하고 정교하고 의미 있는 인도식 벽화였다. 이를테면 공작으로 된 문 위 장식이나 꽃 장식들이 이슬람식이면서도 둥근 천장을 다각형 원으로 깍듯이 표현해서 꼭 벌집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굉장히 규칙적이고 깔끔하다. 색 또한 파스텔톤으로 은근한 매력이 풍기는 시티 팰리스가 정말 맘에 들었다.

그 중 하나가 1728년 자이싱 2세가 건축한 찬드라 마할 일명 달빛 궁전이란다. 그리고 마하라자(인도의 지방 군주)가 살던 곳이었는데 한 쪽에는 그 드넓은 벽 한 면을 총으로 둥글게 꽉 채운 곳도 있어 뭔가 인도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보였다.

많은 관광객들로 어수선하긴 하지만 곳곳의 장식이나 문과 문의 연결 그리고 이어지는 긴 통로 끝에 어김없이 다시 열리는 문 위의 또 다른 장식과 함께 충분히 태양과 달빛을 받을 수 있는 폐쇄적이면서 위로 열린 구조가 역사의 미로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재미있었다. 단지 아쉽다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떨어뜨려 셔터가 닫히지는 않았지만 그 때 기분으로는 그것도 운명이지 하면서 개의치 않게 되었었다. ‘사진은 남겠지’라고 위로하며. 그 때 가이더님이 보시고 여행자 보험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해서 일말의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한국에 오자마자 신청했는데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긴 하다.

시티 팰리스에서 관람을 하고 걸어서 내려오다가 보고 싶었던 인도 문화체험을 했다. 뜻하지 않게 본 짧은 인도 인형극이었지만 정말 신선하고 이색적이었으며 하나 더 더하여 표현하면 매력적이었다. 하나같이 인형들이 키가 크다. 인도 특유의 원색의 입을 늘씬하게 빼어 입은 인형들이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 악사들과 함께 충분히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전설속의 공주와 왕자 그리고 악의 화신 뱀. 아무래도 여기 고성을 배경으로 한 이 인형극은 누구나 아는 단순한 스토리를 무척 사실처럼 연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실에 달린 인형이었다 할지라도 너무 극적이었기에 박수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다음으로 마이클 잭슨을 흉내 내 춤을 보여준 인형 또한 늘씬한 다리를 뽐내며 춤의 화신이라도 되는 냥 발끝을 질질 끄는데 영락없는 그 사람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살아서 보았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우리라도 보았으니 웃을 수 있었고 끝은 코미디 같았지만 인도 사람들도 ‘웃는 문화를 즐길 줄 아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내려오는 가파른 돌길이 즐거웠다.

 

자이싱 2세가 건립했다는 천문대 잔타르 만타르도 다녀왔었는데 정확히 시티 팰리스 전이었나 후였나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너무 많이 내리쬐는 햇볕과 너무 많은 사람들로 밀려다니는데 설명도 수학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계산문제라 이해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거대한 천문학적 도구들이 이색적이긴 했다. 우리나라 선덕여왕이 갑자기 생각이 나며 고마운 생각이 들긴 했었다. 신라시대 첨성대의 중요성이 내 마음에서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건립이 서기 647년 이었으니 7세기라 하면 18세기에 지어진 이 곳 잔타르 만타르 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보인다. 괜히 뿌듯했다.

아무래도 그 날 천문대 잔타르 만타르를 먼저 다녀오고 시티팰리스를 간 것으로 보인다. 다음부터는 사진만 믿지 말고 기록도 간간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그런데 또 갈 수 있을까?

다음으로 간 곳은 오늘의 빅 하이라이트 바람의 궁전 하와마할 이었다.

다시 릭샤를 타고 내려와서 함께 간 곳이 이름에서부터 기대되는 바람의 궁전. 정말 뭔가가 있을 것 같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갈아 탄 대형버스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선 듯 했다. 버스를 주차하고 줄을 세우고 기다리고 섰는데 어느 인도 여인이 아이를 안고 우리 옆으로 왔는데 손이 없었다. 바라나시에서 할아버지들이나 남자들은 봤어도 여자가 그런 모습을 보니 어찌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아프리카에서 목화솜을 나무에서 채취하는데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가족들 손을 ... 끔찍했다. 노예를 팔고 사는 시대도 아니고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고 산다는 사실이 멀리 아프리카가 아닌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사연을 알 수는 없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슬픔의 빛을 내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비추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에게는 지금 필요한 것이 하나였다. 상처가 깊을 텐데 겉으로 드러난 상처를 보이며 ‘아픔을 나누어 주세요’라고 말을 하는 듯 했다. 아! 인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다시 걸어서 거무튀튀한 굴다리를 지나 보니 또 다른 자이푸르가 펼쳐졌다. 얼마나 혼잡한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무조건 가이더를 따라갔다.

드디어 1799년에 지어진 5층짜리 성에 닿았다. 분홍빛 자태가 석굴에 구멍을 뚫은 것도 같고 특이한 벌집 같기도 하고 섬을 구멍이 많은 돌들을 모아 쌓아 놓은 듯도 한 하와마할. 바람이 잘 통하는 격자형 창문이 벌집처럼 많아 바람의 궁전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궁의 여인들이 자기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고 한다. 여인들이여 아직도 그 안에 있습니까. 우리가 보입니까. 그 안은 안전합니까. 무엇이 보이시나요?

다른 일행들이 하와마할 바로 주위에 있는 시장에서 구경을 할 제 나와 우리 딸을 포함해서 3명은 하와마할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각이라 많이 볼 수는 없었고 3명이라 입장권도 단체가 아닌 개별로 끊고 들어갔다. 1인당 100루피.

나는 옛날 그 여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2층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3층부터는 긴 복도를 올라가니 여지없이 벌집처럼 연이어 있는 창문 들 창문들. 어느 문을 열어도 높디 높은 이 곳 성 밖에서 들어오는 풍경은 같은 인도인이 밖과 안에 있었겠지만, 바람은 사연을 담아 이 창턱을 넘었겠지. 오늘은 축제를 보고 내일은 슬픈 인간의 모습에 놀라고 그리고 그 다음 날은 먼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큰 기대를 하며 들어왔는데 역시 그 안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소리는 건조한 기운이 전하는 대로 그렇게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역시 궁이란 밖에서 보기는 화려해도 한 번 안으로 들면 그만인 곳 이었나보다. 안팎으로 슬픔이 전해져 다시 복잡한 시장으로 나가 사람들 틈에 끼어 보리라.

한 바퀴 시장을 돌다 인도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가 사진기로 찍을 수는 없었지만 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도장이 되는 표정들. 인도인들은 아직 표정을 만들지는 않는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여인이 온 몸에 장식용 긴 줄에 인도식 기념품을 하나 가득 두르고 팔려고 서 있었다. 해가 져서 어둑해지는데 팔려고 관광객에게 다가선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물품들로 휘 감은 몸에서 어떠한 기운도 없이 멍하니 한 가게 안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어디가나 있게 마련이지만 이 여인은 어두워져 해가 떨어질 때인 그 때 버티고 설 기운도 다 떨어졌나보다. 물건이라도 좀 좋은 것을 들고 있으면 사 주련만.

팔아야 하지만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것조차 잊은 듯 멍한 이 여인은 오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그녀를 쳐다 보다 내가 그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다가 갔다. 눈을 마주쳤다. 웃는다. 인도여. 아름다운 당신의 미소를 영원히 간직하소서.

인도에서 찍을 수 없었던 사진, 찍히지 않는 사진.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살아있는 사진. 오늘 나는 참 인도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살려고 노력하는 착한 인도를.

 

이제부터는 착한 인도의 반전 후속편이다.

여기 오기 바로 전 서 이사님이 인도에서 물건을 살 때는 1/7정도 깎으라고 분명 언질을 주었는데도 깜박 잊고 아니 설마 하다가 사기꾼한테 당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꼭꼭꼭.

우리나라가 무엇이든지 잘 만들기에 그리고 물건을 사면 무거워서 나르기가 힘들어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냥 한 바퀴를 돌며 구경을 하는데 코끼리 무늬를 놓은 가방이 눈에 띄었다. 부티나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이슬람 문양을 보고 다닌 터라 그 가방의 무늬가 맘에 들었다. 그래서 사려고 가게에 들어서려는 순간 어떤 인도 남자가 갑자기 따라 들어와 흥정을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가게 주인이 아니고 일명 커미셔너였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직업이라 생소했지만 인도의 시장에서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다.

맨 처음에 145불을 제시를 했다. 그리고 나보고 가격을 제시하라고 한다. 45불을 제시를 했더니 특유의 부산을 떨더니 더 달라고 한다. 결국 50달러 주고 4개를 주고 샀는데 계속 그 커미셔너가 너무 싸게 팔았다고 투덜거렸다. 정말 그럴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와서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며 섰는데 앞 가게에서 똑 같은 가방을 5달러라고 했다. 아연실색! 완전 사기 당한 기분! 더하여 그 사람은 커미셔너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그럼 내가 산 가방 가게 주인은 또 그걸 알면서도 속 검은 묵인 하에 관광객을 상대로 고무줄 가격으로 우리를 우롱했으니 정말 기분이 상했었다. 그 인도 커미셔너가 지나 가 길래 말했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자기 이름이 ‘바부르’라고 거들먹거리며 갔다. 뭐야 정말 사기꾼 인도인을 다 만나다니.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인도에 관한 것을 들추다 보니 ‘바부르’가 무굴제국 제 1대 왕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런 사기꾼이 왕의 이름까지 사칭하다니 정말 불쾌했다. 속은 내가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리요. 그래서 결국은 인도의 恥部까지 보게 된 것이었다. 여행의 기념 치고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더하여 그 얼굴 인상조차도 뻔뻔함이 묻어나 인도가 싫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내 탓이다. 서 이사님 말만 잘 들었어도...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사실 그 물건 사러 들어갈 때 일행 중 한 분과 같이 들어갔었다. 그것도 내가 부탁을 해서. 인도에서 가게로 여자 둘만 들어간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이 동행한 그 분이 나중에 더 미안해 했다. 내가 속아 물건을 산 것이 본인의 잘못인 것처럼 생각이 되었나보다. 버스 안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면서, 그 분 때문에 그래도 마음이 풀렸다. 맞아. 이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지. ‘속이는 사람, 위로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해’라고 생각하며, 배려심과 이해심이 풍부한 그 분이 한창 젊은 이 때 결혼을 안 했다고 하니 좋은 일 있기를 기도해 주고 싶었다.

인도여. 인도여. 인도여.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네. 떠나네. 떠나네.

 

까만 인도의 밤이 더 까매질 때 우리는 인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로 돌아왔다. 인도의 호텔은 꽃 장식이 모두 생화로 얼마나 화려한지 모른다. 이 곳 역시 이름도 모를 흰 꽃을 사람 키보다 더 큰 길이의 호리호리한 옥빛 화병에 담아 입구 한쪽 켠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보았을 때는 그렇게 벅차더니 지금 지쳐서 들어올 때는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 다소곳해 보였다. 아무리 찬란한 꽃도 저녁에는 쉬어야겠지.

우리는 바로 객실로 들기 전에 전통요가를 한 30분 한 것으로 안다. 우리가 늦게 와서인지 요가 선생님이 퉁퉁 불어 보였다. 젊은 남자 분인데 아직 결혼을 안 했는지 계속 엄마라며 전화가 왔다. 그러면서도 할 건 다 했다. 우리나라에도 요가가 많이 유행이긴 하지만 인도식이니까 흥미가 생기긴 했었다. 시범을 먼저 보여주는데 정말 잘 했다. 우리도 열심히 따라 했다. 그런데 일행 중에는 정말 그대로 잘 따라 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앞으로 나와서 한 번 해 보시는데 아무래도 평소에 하셨던 분들 같았다. 나도 집에서 한 번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한국에 오니까 더 바쁜 일들이 많다 보니 이 글을 쓰는 지금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포기하진 말자. 일주일에 한 번 만이라도 아니 생각나는 즉시 5분만해도 좋을 텐데. 사실 떠나기 전 허리가 좀 아팠었다. 물리치료라도 받고 떠나라는 조언에도 그냥 왔는데 인도의 날씨가 덥다보니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다녔었다. 인도의 날씨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거기다 요가까지 금상첨화였다.

더운 나라 인도 요가! 생각나는 동작부터 어디 한 번 해 볼까?

 

 

제 8일 : 2017년 2월 25일 토요일

 

이제 25일 하루는 인도에서 마지막 코스를 꽉 채운 후 바로 새벽 비행기를 타기에

무박 코스가 된다.

신선했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 객실 밖 창문을 보니 건조한 도시에서 아지랑이 같은 삶이 다시 일어날 것 같은 새 날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날은 웬일인지 서 이사님이 짐을 먼저 다 꾸리고 나와 아침을 먹고 바로 떠난다고 했다. 덕분에 더 자려고 먹지 않던 아침을 먹게 되었다. 인도에 와서 주로 먹은 것은 달이었다. 네팔에서도 달 밧이라고 해서 먹어 보았는데 녹두를 넣은 죽으로 카레 맛이 난다. 녹두는 우리 몸에 나쁜 독소와 노폐물을 배출하여 없애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원래 노오란 녹두를 좋아하기에 어김없이 항상 인도 여행 내내 맛있게 먹었었다. 그리고 요구르트와 아이스크림을 항상 먹었고 어떤 날은 애피타이저건 메인이건 다 무시하고 아이스크림부터 왕창왕창 몇 번씩 퍼 먹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입맛이 돈다.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주로 먹은 것이 생선 탕수였다. 인도는 돼지와 소를 먹지 않기에 주로 닭요리가 주로 나왔지만 별로 당기지 않았다. 다행히 생선 요리가 있어서 내내 맛있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주로 먹지 않은 것은 알랑미 쌀로 만든 살랑살랑 날아갈 듯한 밥인데 무게감 있는 우리나라 쌀이 간절했었다. 하지만 여행 중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 현실이 식사에 걸림이 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그런 것조차도 인도의 경험이었기에.

게다가 이 날 아침은 특별한 특식이 나와 정말 행복했다. 일행 중 3분이나 생일이 있으셔서 서 이사님이 미역을 한국에서 챙겨와 준비시켜 주신 것이었다. 생일 케이크도 3개나 나와 우리는 모두 생일 송을 불러 드리고 맛나게 미역국을 먹었었다.

다른 사람의 생일이 미역국으로 하여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인도의 아침이었다.

Happy Birthday to you!

 

바로 암베르 성으로 떠났다. 일찍 왔는데도 불구하고 줄이 엄청났다. 언제 타나 하며 기다리는데 그래도 비교적 쑥쑥 빠졌다. 줄을 서서 보니 코끼리 한 마리당 2명씩 타고 성 위로 오른다. 물론 코끼리를 운전하듯 다루는 터번을 두른 인도인들도 코끼리 목 부문에 타고 계셨다. 코끼리는 인도에서도 네팔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신 시바와 파르바티의 아들인 가네샤라는 신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누구나 인도에서는 행운, 번영, 지혜의 상징으로 여기며 인기가 많은 신이다, 궁이건 인도 어느 상점이건 들어가는 입구에 가네샤 상이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모양도 다양해서 그것만 연구해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는 인도에서 한 번 코끼리 사고가 크게 난 후 동물보호법에 따라 코끼리 100마리가 번호를 달고 1마리당 하루 3번만 아침 7시부터 10시까지 일을 한다고 하니 마음 깊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야 안전할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우리는 그래서 성스럽지만 조심스러운 코끼리를 타고 암베르 성을 올랐다. 천천히 느리게 사선을 그리며 오르는 암베르 성의 모습은 인도에서 인도양식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성이기도 하지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래로는 커다란 못이 보이고 암베르 성 위로 위로 더 높은 곳에는 또 하나의 성 자이가르 성이 있다는 사실이 땅 넓은 인도이지만 정말 궁 역시 넓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성을 중심으로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군사용 벽을 쌓았는데 그 성벽 역시 길기도 길지만 반듯하게 세워진 모습에서 예술작품처럼 여겨졌다. 안에는 쉬시마할이라는 왕비의 방이 있었는데 이 힌두왕가가 이슬람 악바르 대제와 결혼을 맺으면서 만든 혼합된 이슬람 힌두양식 마할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안에 반짝반짝한 거울로 만든 거울의 방이 있었는데 은은한 회색 레이스 원단에 찰랑거리는 보석을 단 인도 여신이 그 방에서 하루 묵으며 자신의 보물로 솜씨를 부린 듯 정확하고도 규칙적인 무늬 배열이 독특해 자꾸자꾸 보게 되는 곳이었다. 물론 일반인 접견을 위한 곳이었고 같은 유리거울의 방이지만 왕비의 방은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꾸 떼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경비하시는 분이 계속 지키고 서 있었다.

조각난 듯 무수히 많은 작은 거울로 저렇게 아름답게 꾸미다니 저 북쪽 눈의 나라 카이의 눈에 들어간 유리가 눈물로 흐르며 아마 여기까지 와서 보물의 방을 이룬 건 아닌지 그 의미가 궁금했다.

또 이 궁전의 특징은 저수조였다. 지하로 들어가는 저수조 입구가 너무 깜깜하고 고요한대다가 지나치게 좁은 계단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단체니까 용기를 내어 핸드폰 손전등을 켜면서 몇 발자국을 내려가니 금방 가느다란 햇살이 내려 보여 저수조 바닥을 보여주었다. 정말 물 한 방울 없었다. 한 바퀴 도니 그것으로 끝 이였지만 누군가는 정성을 들여 이 지하 물 보관 저수조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관리하지 않았을까. 그 사람의 손길을 굳이 상기하며 그 곳을 나오니 햇살이 손전등이나 되는 듯이 우리를 따갑게 비추었다. 눈이 부셨다.

산 위의 자이가르 성에도 갔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커다란 ‘자이 반’이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왕대포도 보았다. 실제로 테스트용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까이 가서 무늬며 구조는 볼 수는 없어도 인도가 전쟁이 많았던 나라임을 상기할 때 이 대포가 인도인의 애환까지도 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있으면 영토와 전리품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 나라 국민들의 애환은 국민이라는 이름하나로 당연히 땅 속에 묻혀지는 희생인 것을.

실제로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 왕이 다라 쉬코 라는 아들을 특별히 사랑했는지, 다른 아들 아우랑제브가 원망의 말을 죽기 전 남긴 것을 보면 심하게 질투나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결국 부왕을 감옥에 가두고 형제들을 죽인 뒤 평생 전쟁광으로 살아 모든 이가 등을 돌렸던 왕 아우랑제브, 그가 남긴 말 중 나에게도 남는 말이 있어 여기에 남겨 새기고자 한다.

“신은 내 가슴 속에 있었으나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너무 뒤늦은 후회였었다.

자이가르 성에서 암베르성 주위의 모습은 한 눈에 긴 성벽을 따라 들어오니 생각건대 높은 곳에서의 왕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하늘을 보고 땅을 보는 것인지 현실에서의 왕의 자리가 허무해 보일 뿐이었다.

한편으로 현지 가이더는 1600년경 라자스탄 왕 마하라자 만싱 때 이 곳에 묻혀있던 어마어마한 보물이 1984년 서거한 인디라 간디(네루의 딸로 수상을 지냄) 시절 델리로 보내졌는데 아직도 델리에 도착하지 않았다며 의미심장한 말만 남겨 이곳 자이푸르 암베르 성과 자이가르 성은 무척 미스터리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참! 암베르성에서 자이가르 성으로 가기 전 잠깐 어제 지나쳤던 물의 여름궁전 잘 마할을 보고 사진을 찍었었다. 지금은 완전히 물에 잠겨 5층만 위로 나와 있어 멀리 옛 라자스탄의 영화가 물 위에 떠 부유하는 듯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는 대형버스를 탔다. 어제 묵었던 호텔로 다시 가서 점심식사를 한 후 우리는 델리로. 델리로. 델리로

델리에서 오라는 사람 없고, 자이푸르에서 가라는 사람 없지만 이 곳을 떠나는 우리는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우리 집.

와우! 집에 가면 한바탕 여름 밤 꿈을 꾼 것처럼 눈을 비비고 일어나 이번 여행도 역시 Happy Ending 이었다고 외치겠지.

거의 5~6시간을 달리며 또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자다가 또 자다가 일어나서 인도의 건조한 마을풍경을 다시 보다 생각을 정리하다... 언제 또 올 거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 하지만 이번 북인도 여행은 인생의 꼭 필수코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나 자신에게 되새겨 보고 보고 또 보고.

그럼 무엇이 그리 남았냐고 물어보고 보고 또 묻는다면.

인도는 인생의 블랙홀 같은 곳이라서 희노애락의 깊은 바닥을 쳐야만 다시 헤엄쳐 나올 수 있는 곳이더라고 대답하고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신의 사랑스런 딸 마더데레사가 계셨고, 신께 바치는 노래 기탄잘리를 헌사한 타고르가 있었고, 자기 성찰에 뛰어났다던 간디가 살았던 곳이니 그런 토양에서 그런 분들이 나옴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연꽃 같은 그런 분들이 계셨기에 인도는 앞으로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델리에 다 도달해서 보니 저녁이 다 되었다. 마지막으로 저녁을 한식인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먹었는데 정말 꿀맛이었다. 여기에서도 한식집을 하시는 우리 한국인이 정말 고맙게 느껴지며 인도인들도 우리 한식을 좋아하게 되길 바란다.

다시 델리에서의 마지막 느낀 점을 정리하자.

블랙홀. 왜 블랙홀인가.

델리를 들어설 때 어두웠지만 보일 건 다 보였다.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의 빈부 차. 도대체 인도는 연꽃 몇 송이로 인도사회를 덮어야 하는 것인가.

버스에서 내려 인도 카레를 사러 가는데 마지막으로 본 인도 여인이 한 아기를 안고 또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나는 카레를 살 마음이 없었기에 얼른 다시 버스로 가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간식을 챙겨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가져다 주었다. 어린 여자 아이 손에는 사발 면을 주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확 채간다. 어리 둥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나도 참 어이가 없다. 내가 뭘 바라고 한 것은 아닌데... 일행을 찾다가 못 찾았고, 어두운 인도 시장 안에서 쳐다보는 인도남자들의 땡글땡글한 눈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뛰다시피 다시 나왔는데 마침 딸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휴 다행이었다. 다시 일행과 버스로 가는데 아까 그 애기 엄마가 뭘 달라고 손을 내민다. 내가 아까 주었다는 시늉을 하자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아아’ 하며 반갑게 날 기억한단다고 했다. 그녀의 웃음이 인도에서 받은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알고 보면 무심한 관계지만 그녀는 적어도 무심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배고프고 오늘을 채워야 하는 힘없는 인도 여인의 마음을...

인도를 떠나면서 마지막 에너지를 돌리며 비행기를 타긴 했지만 아직도 내게는 지울 수 없는 표정, 간절했던 그 손짓, 3억이 넘는 신의 형상을 닮은 인도인들이 실제이며 현실의 모습임을 잊을 수가 없다. 결코 사진으로 찍을 수도 없었고, 오히려 찍어서는 실례가 되는 진정한 인간의 표정을 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델리에는 세계적 유명 호텔 체인점이 찬란한 네온사인을 입간판으로 달고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섰지만 인도여! 당신의 매력은 당신 자신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찍을 수 없었던 인도의 모습, 그 웃음.

7박 9일의 나 같은 사람도 보이는데 신이 당신을 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건조한 공기로 눈물이 아예 마른 그 분들을 위해 작은 기도 올립니다.

인도여! 당신의 대지와 사람을 향한 여행,

기억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03.24

유00 올림